말하는 파인애플 명과 (12)
한달이 지났다.
무진은 여전히 출판단지에서 일용직 생활을 했다. 열심히 일한 덕에 그는 인력사무소에서 꽤나 인기가 좋았다. 공장을 돌아가며 출근했다. 하루도 쉬지 않았다. 기계처럼 일어나서 기계처럼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명과를 위해 법률상담을 알아봤다. 곧 30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자신이 직접 땀을 흘려 돈을 벌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남의 도움을 바라거나 쉬운 길이 있다고 믿어온 무진에게 매일 밤마다 겪은 근육통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명과를 위해 선물을 사는 자신의 모습은 이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행복이었다. 무진은 그 행복에 매료됐다.
어느정도 돈이 생기자 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일을 시작했으며, 지금 당장 전부 다 갚지는 못해도 50만원 정도를 먼저 보내겠다. 정말 미안하다. 무진의 말을 들은 친구는 잠시 조용하더니 지금 어디냐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리고 30분 뒤 정말 무진의 집 앞으로 찾아왔다. 못 본 사이에 멋진 외제차로 변한 친구의 차를 무진은 복잡한 심정으로 봤다. 그 차는 휴대폰 판매 대리점에서 일할 당시 무진이 사고 싶어했던 그 모델이었다.
친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무진을 끌어안았다. 무진은 남자 둘이 밤중에 집 앞에서 끌어안고 있는 것은 국민정서와 맞지 않는다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친구는 무진을 안 놔줬다.
“갚아줘서 고마워.”
“야 너 지금 내가 돈 갚아서 이러는 거야? 이제 앞으로 진짜 잘 갚을게. 미안해 그래도 이건 조금 오버야"
“저번 달에 전화 끊고 얼마나 마음이 복잡했는지 몰라. 네가 설마 이상한 생각까지 했을까 봐,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돈을 안 빌려준 게 원인이니까. 하지만 난 네가 또 일해서 돈도 벌고 좀 사람답게 살았으면 좋겠고 아 진짜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내가 진짜.”
무진은 새삼 놀라서 친구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등학교 때 바보 같던 놈이 이렇게 사려 깊은 성격이었나 떠올려보다가 잘 기억이 안 났다. 무진은 학창 시절에 매일 학교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오토바이 타고 달렸던 것만 떠올랐다. 그래서 또 미안했다. 무진은 남이 죽을까 봐 걱정했던 적이 없었다. 상상도 하기 싫은 걱정을 남에게 시켰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고개가 떨어졌다. 모두에게 해만 끼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은 아닐까. 무진이 갑자기 우울해하자 친구는 재빠르게 차에 태웠다.
“일단 밥 먹으러 가자. 고기 먹자 오는 길에 갈빗집 하나 있더라”
“어.”
“너 새로 시작한 일이 뭐야? ”
“아, 그냥 출판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해."
“와, 지식을 널리 알리는 사업에 네가 몸을 담고 있네. 장하다”
“계속 오버 하네 진짜.”
무진이 입으로는 친구를 말렸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저렇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2년 만에 얼굴 보는 친구. 2년 동안 하는 연락이라고 해봤자 항상 무진이 돈을 빌리는 연락이었다. 명절에는 온라인으로 선물을 받고 생일에 만나자고 해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던 무진이었다. 친구의 차에 앉아서 두런두런 얘기를 하다 보니 새삼 이렇게 착한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도 있어서 신기했다.
둘은 고깃집에 앉아 술도 함께 곁들인 식사를 했다. 무진은 오랜만에 먹는 갈비맛에 정신을 못 차리고 허겁지겁 먹었다. 그의 친구는 천천히 먹으라면서 2인분을 새로 시켜줬다. 정신없이 먹다가 돈 생각에 가격표를 본 무진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놨다. 오늘 먹은 고깃값은 자신이 내야 할 것 같은데 가격표를 보니 함부로 배불렀다간 며칠 일한 돈이 다 날아갔다. 그래서 얘기하다 보면 배가 불러올 것 같아 근황을 물었다.
친구는 2년 전에 좋은 직장에 취업해 지금 대리로 일하고 있었다. 남들이 모두들 선망하는 회사에서 연구직으로, 최근 개발한 모니터의 실적도 매우 좋아 보너스도 두둑하게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 끊임없이 무진의 눈치를 보며 별거 아니라고 손사래쳤다. 사실 무진도 친구의 어색한 행동을 느꼈다. 2년 동안 돈을 빌려 연명했던 사람 앞에서 자신의 성공을 대놓고 자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진은 친구에게 또 미안하고 비참했다. 자신이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한 것보다 친구의 성공을 신나게 축하해 주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점이 마음을 괴롭혔다. 무진이 못나 보일까 봐 자랑하지 못하는 친구와 친구가 자랑조차 마음껏 못하게 만든 무진. 둘은 웃으면서 얘기하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은 어떤 불편한 기류가 아주 살짝 흘렀다.
“너는 요즘 뭐해?”
“나 출판 공장 다닌다니까?”
“그 외에는 말이야.”
“음… 요즘 명과라고 친구가 있는데 그 사람을 도와주고 있어. 사실 도와준다기보다는 도와주려고 노력하고 있어”
“도와주는 거랑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게 다른 거야?...”
“아직 실질적인 도움은 못 줬거든… 그래서 노력하는 거지”
무진은 친구에게 명과에 관련된 일을 얘기했다. 친구는 명과를 흥미롭게 생각하다가 사장의 만행에는 분노하고 마지막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명과가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를 법적 보호를 받게 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며 변호사들과 똑같은 얘기를 했다. 무진은 힘이 빠져 술을 한잔 넘기고 입을 닦았다.
“맞아. 요새는 좀 나도 힘이 빠지는 것 같아. 내 주제 누굴 돕나 이런 생각도 하고 내가...”
“너 고등학교 때 나 도와준 것 기억나냐?”
“내가?”
“심지어 다른 반이었을 때 내가 맨날 일본 만화만 보니까 몇 명이 꼴 보기 싫다고 내 PMP 부시고 때리고 그랬는데 네가 막아줬잖아”
“와 PMP 진짜 오랜만에 듣는다... 잠깐, 내가?”
“너 그때 오토바이 타고 무서운 애들하고도 놀고 그랬으니까 네가 말하니까 애들이 찍소리 못하고 나 안 괴롭혔었어.”
“진짜 내가 그랬어?”
“심지어 담임한테도 말해서 걔네 부모님이 PMP도 새로 사줬었어. 넌 진짜 하나도 기억이 안 나? 학교폭력 어쩌고 하면서 일 커질까 봐 부모님들 다 학교에 와서 교장실에서 모이고 그랬었잖아. 그때 네가 걔네들이 어떻게 했다 이런 증언도 했었잖아.”
무진은 친구의 말을 따라 기억을 타고 올라가 가물가물한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교장실에 있었던 적은 많았다. 대부분이 혼나러 들어간 기억뿐이었다. 몇 번 애들끼리 싸웠던걸 말린 기억도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친구가 말하는 정의로운 무진이었을 것 같았다. 무진은 소주를 입에 머금고 씩 웃었다.
“내가 그랬어? 잘했네.”
“그때 엄마가 물어봤었거든? 너랑 친하냐고. 내가 안 친하다고 했어. 그때는 우리 진짜 안 친했잖아. 왜 안 친했는데 넌 날 도와줬을까 고민하다가 친해진 건데… 명과랑 너 얘기 들으니까 그때 생각난다.”
“그래도 그 때랑은 다르지”
“사람이 사람 돕는데 주제 따지고 이유 따질 필요가 있어? 그냥 도와주는 거지. 난 너한테 뭐 받을라고 돈 빌려줬냐. 끝까지 잘 해봐”
무진은 대답대신 건배를 했다. 목을 넘어가는 술이 썼다. 무진이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이미 밥값은 결제 되어있었다. 무진은 미안하다고 지금이라도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친구는 앞으로 3개월간 매달 꼬박꼬박 돈을 갚기로 약속해달라며 헤어졌다. 무진은 기분 좋은 취기에 절여져 집에 도착했다.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세상에 빙빙 돌았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무렇게나 옷을 벗고 솜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숨에서 소주 냄새가 가득했다. 그게 싫어 잠시 숨을 멈췄다. 순식간에 우주 한복판으로 던져진 것 마냥 세상은 고요했다. 그 공허한 순간에 무진의 몸이 조금씩 떨렸다. 이불에 파묻은 얼굴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도하는 것 같기도, 후회하는 것 같기도 한 울음소리가 아무도 들을 수 없게 작은 소리로 흘렀다.
아무리 과거를 뒤져봐도 잘한 짓이라곤 하나 없었던 무진에게 언제나 냉혹한 현실은 자신의 탓이었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살지 않았더라면, 가족들에게 빚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술 먹고 운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쉽게 돈 벌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조금 더 집중했더라면.
큰 걱정 없이 발 가는 대로 걸어온 인생은 뒤돌아보니 거대한 진흙탕이었다. 내세울 일 하나 없는 거대한 후회의 덩어리였다. 그래서 더욱 명과의 일에 몰입했었다. 명과는 자신과 다른데,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그에 비해 얻는 것들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명과만큼은 훗날 과거를 돌아봤을 때 좋았던 기억들이 몇 개 남아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명과를 도와주면서도 끊임없이 속에서 되물었다. 이제 와서 자신이 착한 척, 고상한 척, 명과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넌 틀렸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그런데, 진흙 범벅이었던 과거 속에 한줌 마른 땅이 있었다. 무진도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시절이 존재했다. 평생을 엉망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한 무진에게 오늘 친구가 들려준, 새까맣게 잊고 살았던 학창 시절 얘기는 소박한 구원과 같았다. 무진은 이불에 얼굴을 박고 흐느껴 울었다. 물론 10년도 더 된 선행으로 무진에게 남들을 지적할 자격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미워 매일 스스로 학대하던 무진은 다시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았다. 그의 두 눈에서 사춘기보다 더 복잡한 감정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