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파인애플 명과 (5)
무진은 집으로 가는 길에 마음이 무거웠다.
명과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호의를 받고 있음을 깨닫고는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명과는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정작 본인에게 들어오는 돈은 한달에 15만원 정도가 전부였다. 월급은 150만원으로 책정되어있지만 15만원을 제외한 모든 돈은 제주도 요양병원에 계신 할머니에게 바로 송금된다고 했다. 달에 15만원을 받는 사람에게 사례금이라고 5만원을 받고도 4만원짜리 불고기전골을 사달라하고 벼룩을 간도 아니고 벼룩 자체를 잡아먹은 꼴이었다.
동시에 사장의 태도에 분노했다. 세상 어느 직업이 한달에 90시간 넘게 일하면서 사장의 집안일도 돕고 150만원을 받을까? 최저시급에도 한참 못 미치는 그런 월급을 주면서 또 입은 어찌나 거칠었는지 자신과 잠깐 얘기했다고 욕부터 지껄이는 그 모습이 괘씸했다.
명과와 관련된 모든 상황이 불편하지만 그 중에서도 자꾸 마음에 걸리는건 명과의 표정이었다. 파인애플 껍질 때문에 사람의 표정처럼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의 표정은 감정이 고장난 사람처럼 굴었다. 웃다가 공허해하고 우울하다가 신을 냈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남의 표정을 따라하는 것 같았다.
“지금 말씀하신 모든 것이 전부 법 위반인거 알고 계세요?”
“몰랐지만… 알았다한들 뭐 어쩌겠어요. ”
“어쩌긴요! 사장한테 말해서 요구하고 안 들어주면 나와야죠. 일할 곳이야 얼마든지 있는데”
“얼마든지 있다면서 무진씨도 일 못 구하셨잖아요”
“아…”
“지금은 적어도 할머니께 도움이 될 수 있잖아요.”
“저는 몰라도 명과씨는 일 잘하니까 다른 곳에서 훨씬 좋은 조건으로 일할 수 있을거예요. 전 파인애플 그렇게 많이 사가는 사람들 처음 봤어요. 그런걸 보면 명과씨, 영업직의 고급인재잖아요? 제가 사장이었으면 명과 같은 사람은 완전 환영하죠.”
“흠… 아까는 파인애플이라서 이상하다더니 지금은 또 환영할 만한 사람이에요?”
“….”
“무진씨는 재밌는 사람이에요. 정말로”
마지막까지 명과의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명과의 대화를 떠올리던 무진은 마지막에 대답하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명과는 파인애플인가 사람인가. 자신도 헷갈렸다. 명과가 파인애플을 자를 땐 징그러웠다. 하지만 대화하다 보면 사람 그 자체였다. 심지어 베풀 줄 아는 사람. 그런 명과가 자연스럽게 불합리한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무진은 잠에 들기 전까지 명과생각을 했다. 첫사랑을 시작한 남학생 같은 행동이었지만 행동의 원인은 전혀 다른 마음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정의감 같은 심리였다. 불합리한 상황 속에 놓인 선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느낌이 강했다. 자기 입에 풀칠도 못하는 무진이 남을 돕고 싶어 하는 것은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시간이 남아서, 혹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감사함에, 혹은 그냥 평생 정의감이 없다가 이번에 발휘할 기회를 만나서 일지도 몰랐다. 이유가 어찌됐든 무진은 진심으로 명과가 잘되길 빌었다. 그리고 명과가 잘되게 도와준다면 자신도 한 층 더 나은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명과를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잠이 들었다.
무진이 눈을 떴을 때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심지어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몸에 생기가 넘쳤다. 평소 같으면 일어난 모습 그대로 핸드폰만 쥐고 있었겠지만 그는 활기차게 기지개를 켜고 허리를 좌우로 비틀며 스트레칭을 했다. 좁은 화장실에 들어가 물에 불어터진 비누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닦았다. 샤워는 귀찮고 우울한 일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무진은 그저 빨리 씻고 도서관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도서관에 가본적 없는 그가 갑자기 도서관에 가고 싶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도서관에 가면 와이파이가 무료였다. 심지어 모든 칸이 채워져 있는 강력한 와이파이가. 명과가 궁금해져 그를 검색하자 그와 관련된 글과 동영상이 꽤 많이 나왔다. 나름 유명인사였는데 요즘은 시들했다. 블로그에 기재된 글들은 전부 2년전에 멈춰 있고 가장 최근 올라온 영상도 1년전에 촬영된 것이었다.
도서관에 도착해 건물과 가장 가까운 벤치에 앉아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가장 오래된 동영상부터 보기 시작했다. 전국에 있는 특이한 사람들을 취재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명과가 출연한 편의 제목은 [말하는 파인애플 명과]였다. 개그맨 패널이 우스꽝스러운 파인애플 변장을 하고 말하는 파인애플이 있다고 하면 메인 엠씨들은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도 말을 한다면서 웃었다. 하지만 화면이 바뀌고 제주도에서 일하고 있는 명과가 나오면 다들 놀람 반 무서움 반으로 소리질렀다.
명과는 그 당시에 옷도 입고 있지 않고 행동 또한 살짝 어색했다. 그 당시 명과는 걸음걸이도 뒤뚱거리며 손에 쥐고 있는 것도 자주 흘렸다. 얼굴은 지금 보다 더 굳어서 웃는지 우는지, 힘든지 편한지 알 수가 없었다. 취재진이 다가가도 별 감흥 없이 그저 밭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물어봐도 대답 없는 명과에 당황한 취재진은 마을 어르신들을 찾고 그들에게서 명과 이야기를 들었다.
‘명과는 어느날 이영감네 파인애플 밭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다. 그때는 무릎까지 밖에 안 오는 키였는데 불과 한 두 달 만에 180센치로 자랐고 할머니를 도와 밭일을 도맡아 했다. ‘
그리고 할머니를 찾아 뵙고 인터뷰를 했다.
“우리 영감이 떠난지 딱 한 달째 되던 날 명과가 나타났어요. 처음에는 무슨 도깨비인가 싶어서 기겁을 했는데. 지금은 영감이 나 외로울까봐 영물을 남겨놓은 것 같아요”
할머니는 명과를 복돌이 라고 부르며 손자 대하듯 사랑이 넘쳤다. 명과와 처음 만났던 날을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말하고 명과가 일하는 곳에 꼬박꼬박 찾아가 물을 줬다. 명과가 가끔 자는 날에는 자는 사이 줄기가 마음대로 자라지 않게 여름 이불로 돌돌 말아준다고 했다. 리포터도 정말 사랑스러운 가족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할머니와의 추억을 얘기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대화들의 연속.
그러나 다른 영상 속 어린 명과의 인터뷰 영상은 달랐다.
“어느 날 벼락을 맞았고 스스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간이 되고 싶었다. 인간이 이렇게 일만 하는 동물 인줄 알았다면 새나 고양이가 될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