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스포일러)
-연규는 아빠 같은 거 없이 삽니다. 때문에 가정은 불안정하고,롤모델이 될 성인 남성이 없죠. 중반에 회식 장면에서 큰형님이 손도 안 댔는데 먼저 먹고 있는 부분에서 예의범절을 배우지 못한 상태임이 보입니다. 눈이 사시인 것도 시선에 방향성이 없다는 느낌입니다.먼저 매운탕을 끓여 주고,주폭을 일삼는 새아버지와 달리 술을 하지 않고,합의금도 대신 준 치건은 모범적인 롤 모델이 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매운탕을 손으로 집어먹는 동작을 따라하고,회식 자리에서 혼자 치건처럼 먹은 모습도 사회적 규범보다 치건을 중시함이 보입니다.
-반면 치건이 연규를 아끼는 것은 동생이나 조카보다는 자신의 분신을 구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아버지라는 인간이 제 구실을 못하고 고립된 아이라는 데서 동병상련을 느끼고,나처럼은 되지 말라는 뜻에서 큰형님의 말까지 거스르고 결국 목숨마저 내줍니다.
-큰형님이 치건을 낚아 올렸지만 결과적으로 구제해주기는 커녕 도구로 쓰고 죽고 나면 관심도 없듯이,연규가 인간적인 교감을 쌓았다고 치건이 착한 사람이 아님은 중반에 신발을 신고 집을 짓밟는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치건은 문신도 없고 깔끔하고 하얀 모습으로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귀만 봐도 충분히 섬뜩하고 괴상한 연혁을 가졌음이 보입니다.낭만적인 의리가 아니라 못난 어른이 못난 아이에게 베푸는 호의일 뿐이기에 더욱 찐득합니다.
-이 영화에서 송중기의 연기의 장점은 오히려 "송중기가 아니어도 상관없다"입니다.송중기의 스타성을 과시하지도 않고,송중기가 거친 건달 역할을 한다는데 의의를 두고 굳이 위악스럽게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정말 연규를 돋보이기 위한 치건이라는 역할에만 충실하려고 합니다.
-후반에 연규는 다리를 다쳐서 계속 등장하던 절름발이 채무자 아빠와 같은 모습으로 도망치게 됩니다.악에 발을 들인 업보이기도 하고,지킬 게 있는 사람이기에 발을 절면서도 달려야 한다는 동병상련으로 등치됩니다.
-새아버지는 나무로 상징됩니다. 첫 등장 때 연규를 나무 배트로 팼고,결국 연규는 나무 화분 때문에 상처를 입습니다. 술을 또 사왔다고 오해한 장면에서 나무에 놓을 영양제를 사왔는데,결국 사람이 달라지지 않은 데서 자기가 술을 마시는 것과 나무가 영양제를 흡수하는 것은 일맥상통합니다. 또한 이 아버지는 몹시 비정상적인데,상식적으로 사춘기가 지난 딸을 또래 남성과 한 방에 수용하지 않습니다.그럼에도 그 부분에 대해 문제의식이나 불안을 보여주지 않습니다.오히려 딸에게 의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단순히 주폭이 문제가 아니라 어른다움을 보여 줄 수 없는 사람임이 느껴집니다.
-명안시는 <아수라>의 안남 같은 지옥도이며,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무기력의 늪으로 묘사됩니다.연규가 치건을 죽인 후 어머니를 죽인 새아버지를 처단하지 않고 어머니와 같은 자세로 옆에 앉은 뒤 하얀과 도망치는 모습은 죽어야,연을 끊어야만 나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모아 둔 돈은 그저 흩뿌려졌고,전혀 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치건은 연규를 아낄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수단으로 동네를 나가고 싶어서 목숨을 내 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치건이라는 아버지 역할을 살해했기에 아버지 같지도 않은 새아버지를 죽여서 손을 더럽히지는 않고 두 아이는 진흙탕을 벗어났습니다.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을 연상시키는 삼각 브로맨스도 인상적입니다.매운탕을 함께 먹기 전까지는 승무(정재광)가 오히려 연규와 가깝습니다. 치건은 분대장처럼 잘해주고 말은 곱게 하지만 급 차이로 거리가 있다면,오히려 맞선임처럼 자주 부대끼고 장난스레 괴롭히며 가르쳐주는 승무가 더 친밀해 보입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연규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고 유하게 구는 치건의 모습에 의의를 갖고 반기를 들며 질투하는 모습 또한 애처롭습니다.승무의 옷을 뺏어서 연규에게 준 장면부터 아끼는 사람의 자리를 빼앗겼음이 보이죠. 못에 맞고도 죽은 치건을 보며 감회에 사로잡힌 승무가 애처롭습니다.
-후반부의 오해는 말로 충분히 해결 가능하지만 이 영화가 영리한 점은 둘 다 말이 서투르고 잘 표현하지 않는 못난 사람들이라는 점을 잘 쌓아놨다는 겁니다.말 한마디만 나누어도 해결 될 일이지만 서투르고 못난 형과 동생은 그저 밀어붙이고 삭히며 대립합니다.감정과 의견을 정상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도,그럴 수도 없는 환경이 주어져 왔습니다. 늪처럼 서서히 젖어들고 빠질 뿐,무엇 하나 의미 있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무력감에 젖은 등장인물들이 설득력 있게 전달됩니다.
-연규와 하얀은 살갑지도 않지만 티격태격하며 충분히 남매 같기도 하고,친구 같기도 한 묘한 관계입니다.이 괴상한 관계라서 오히려 하얀을 앞세워서 사무소로 들어가고,하얀을 담보마냥 맡겨두고 돈을 가지러 가는 기묘한 행위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