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MC Last Dance 특별리뷰1)딥플로우 정규 3집-양화 (2022.5.8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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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다움'의 척도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날 선 공격성을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솔직함을 논할 것이다. 이 정신론적인 부분과, 탁월한 수준의 사운드적 설계가 결합되는 순간, 비로소 '힙합적인 명반'이 나온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나스의 'Illmatic'(1994)이 그랬듯, 에미넴의 'The Eminem Show'(2002)가 그랬듯. 본작은 한 때 한국에서 이 기준에 가장 합치되었던 앨범이었다. 그 뒤 씬의 분위기도 참 많이 변했고, 앨범의 화자인 딥플로우도 변했다. 그 과정에서 이 앨범의 메세지에 금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앨범이 구시대의 명반으로만 남겨져 사라져야 하는가? 다시금 한국 힙합의 본질에 대한 논의가 씬에서 새로이 제기되고, 씬의 과도한 상업화에 대해 우려하는 리스너들도 다시 늘어나는 작금의 현실에서, 순간의 말초적 솔직함을 고도의 사운드와 정교한 서사로 담아냈던 이 앨범을 재조명하는 것에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시간이 지나도, 유효한 이야기는 존재하는 법이니까.
사운드를 주도하는 것은 TK(現 반 루터)와 딥플로우다. 듣다 보면 이 둘의 포지션이 명확히 구분되는데, 딥플로우가 '작두'나 '잘 어울려'같은 90년대 풍의 깊고 진한 붐뱁으로 감칠맛을 주는 가운데, TK가 '낡은 신발', '당산대형'이나 '빌어먹을 안도감', '가족의 탄생' 같은 트랩-서던 힙합 넘버, 또 '양화', 'Bucket List', 'Dead Line' 같은 알앤비의 색이 더해진 트랙 등 커머셜한 곡들로 앨범의 전체적인 균형을 맞춘다. 특히 '잘 어울려'에서의 지펑크 풍 신시사이저를 통해 더욱 신랄해진 조롱의 맛, 또 한국 전통 무가(巫歌)를 샘플링해 강렬함이 극대화된 '작두'에서 딥플로우의 프로듀싱 감각이 제대로 물올랐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를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보좌하는 TK의 프로덕션도 놓칠 수 없는 지점이다. '불구경'과 '당산대형'과 같은 정석적인 렉스 루거 류의 트랩 넘버는 물론, 여기에 앤틱한 샘플 운용으로 독특한 맛을 더한 '낡은 신발'과 'Cliche', UGK나 T.I.를 연상시기는 고전적인 서던 힙합 넘버인 '빌어먹을 안도감'과 '개로 (開路)'부터 저스트 블레이즈 류의 서정성으로 앨범 서사의 중요 부분을 장식하는 '양화', 웨스턴 스코어와 붐뱁의 절묘한 조화로 앨범의 서장을 여는 '열반' 등 TK가 힙합의 다방면에서 펼쳐보이는 매운 솜씨는 앨범의 스토리라인에 적절히 스며들며 서사성을 탁월히 강화시켜준다.
그리고 이 모든 트랙들은 여러 스킷들을 통해 서울, 정확히는 양화대교를 통해 영등포와 홍대 거리를 오가는 화자의 삶이라는 앨범의 내러티브와 연결된다. 영등포에서 한강 건너의 홍대를 바라보던 류상구의 모습에는 패기가 가득했다. '열반'과 '불구경'의 염세와 냉소, '낡은 신발'의 자부에 서려있는 그런 패기다. 양화대교로 한강을 건너 래퍼 '딥플로우'로 홍대에 온 딥플로우는 그 패기를 뜨거운 분노와 맹렬한 기운으로 표출해낸다. '잘 어울려'의 신랄한 조롱, '당산대형'에 드러나는 크루와 씬의 큰 형님으로서의 포부, 무엇보다도 '작두'를 통해 드러나는 무대 위에서의 신들린 듯한 기세는 그야말로 '힙합'의 스테레오 타입에 걸맞는 이상적인 래퍼의 모습 그 자체다. 그런 그가 홍대에 '빌어먹을 안도감'을 지니는 건 당연한 일일 터. 그러나 그런 딥플로우도 현실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질 뿐이다. 그 허망함을 가지고서 딥플로우는 '나 먼저 갈게'라는 인사만 남기고 영등포로 돌아간다. 꿈을 지키겠다는 다짐과 함께 '양화'를 건너 영등포로 돌아온 류상구, 그의 앞에 현실의 해일이 밀려온다. 높은 집 값에 밀려 '역마'살 낀 것 마냥 떠돌기도 하고, 'Cliche'를 따르라는 세상의 압력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도 류상구는 늘 씩씩했다. 실패와 성공의 'Dead Line'을 지워보려 애를 쓰거나, 힘들었던 삶을 돌아본 뒤, '개로 (開路)', 즉 길을 열겠노라고 외치며, 아버지의 아들로서 꿈을 꾸고 지켜가겠다는 약속을 'Bucket List'에 맹세하고는 자신의 동료들과 다시금 '가족의 탄생'을 알린다. 꿈과 현실 사이 모순과 갈등을 오가던 딥플로우, 그리고 류상구가 그 경계선인 양화대교 위에 우뚝 섰던 순간이었다.
'양화'는 자신의 개인적인 서사가 담긴 앨범이지만, 사실 이상과 현실, 또 공과 사의 대립은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겪는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 앨범에는 이러한 '보편성'에 공감하는 많은 아티스트들의 풍성한 참여가 더해졌다. 우선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던밀스를 위시하여 넉살, 우탄, 벤, 오디 등 비스메이져 크루의 중핵들이다. 이중에서도 '작두'에서 인생 벌스를 남기며 본격적 하입을 받은 넉살과, 유일하게 두 트랙에 참여하여 훅, 벌스 양면에서 시원한 타격감을 뽐내는 던밀스의 존재감이 돋보인다. 드래곤AT, 차붐, 허클베리피, Kayon 등 비슷한 연배의 래퍼들의 벌스가 딥플로우의 서사에 대한 공감대를 극대화 하는 가운데, 또 한편으로는 바스코(現 빌 스택스), 션이슬로우, DJ 소울스케이프 같은 씬의 원로급 인사들이 앨범의 내러티브에 무게감과 설득력을 부여해 주기도 한다. '힙합 꼰대', 또 벽창호같은 이미지가 당시 강했음에도 의외로 많은 보컬들의 참여가 곳곳에 보이는데, 특히 소울맨의 벅차오르는 듯한 보컬과 우혜미의 따뜻한 보컬은 앨범의 전체적인 감정선을 몇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신의 한 수'였다. 사실 이 시점의 딥플로우가 마냥 꽉 막혀 있었다고 보기도 뭣 한 게, 인터뷰에서 '제가 진짜 동경하고 좋아했던 래퍼는 맙 딥, 나스, 제이지도 그렇고, 생각해보면 완전 다 개 커머셜 래퍼들이거든요.' 같은 발언을 하기도 하고, 러브 송에 대해서도 '멋있는 사랑 이야기를 멋있는 방식으로 하는 게 저의 과제 같은 거죠. (...) 알만한 사람이 그런 걸 안 하고 편법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구리다고 생각하는 거죠. 사랑을 소재로 이야기하는 걸 구리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같은 견해를 밝히며 상업성에 대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앨범의 완성도와 서사를 위해서는, 래퍼건 보컬이건 딥플로우에게는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딥플로우가 끝까지 지켜내고 싶었던 꿈과 절개, 신조는 자본과 매체라는 현실의 벽앞에 스러지고 말았다. 존경받던 그에게는 어느새 '뱀'이라는 멸칭이 붙었고, 사람들은 앨범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공격성을 트집 삼아 딥플로우에게 족쇄를 채웠다. 순간순간에 솔직했던 죗값이라기엔, 너무도 참담한 것이었다. 물론, 언행일치에 실패한 그가 소위 말하는 '스트릿 크레딧(Street Credit)'을 잃었다는, 즉 힙합적으로 멋이 없게 되어버렸다는 부분은 인정할 수 밖에 없고, 이를 옹호할 생각도 없다. 다만 이해해 주길 바랄 뿐이다. 그는 매 순간 자신의 가족과 크루에 진심이었노라고. 어떻게든 모두를 지켜내려 발버둥 치느라 자신의 멋을 초개와 같이 내던졌던 것이라고. 이뤄내지 못한, 지켜내지 못한 그의 꿈이, 현실에 밀려 무너지고 만 그의 꿈이 그저 안타깝고 서러울 따름이다.
P.S. 그럼에도, 그는 다시금 일어섰다. 밴드 사운드를 적극 활용했던 'FOUNDER'(2020)는 자부와 자조라는 양가 감정이 두루 어울린 또 하나의 역작이 되었고, 최근에는 서리 크루와 어울리며 네오 붐뱁으로 방향을 튼 채 차기작인 'Apophenia'를 준비 중이다. 꿈이 무너졌다면, 다시 일으켜 세울 뿐이다. 그의 새로운 비전과 이상을 응원한다.
Best Track: 당산대형 (Feat. DJ Soulscape, Don Mills, VASCO), 작두 (Feat. 넉살, Huckleberry P), 양화 (Feat. Soul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