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을 잘 짜는 사람이 있는 곳은?
윈체스터 ㅋㅋ
win chess 터 라서 ㅋㅋ
윈체스터에서 두 번째 대관식을 거행한 리처드 1세는 중세 유럽의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평가받습니다. 그를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하는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의 전략적 능력
- 아크레 공성전 (1191년): 리처드는 1191년 제3차 십자군 원정 중 아크레 공성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아크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으며, 리처드는 복잡한 공성 전술을 활용해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그는 해상과 육상의 공격을 조화롭게 활용해 도시를 포위하고, 병참 지원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면서 공성을 이끌어 냈습니다.
- 아르수프 전투 (1191년): 아르수프 전투는 리처드의 군사적 천재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는 이슬람군의 매복과 게릴라 전술에 대응해 질서정연한 철수를 이끌면서 군대의 사기를 유지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역습을 감행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리처드는 군대의 질서를 유지하고 적군의 허점을 정확히 파악해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2. 십자군의 전술적 혁신
- 전투 대형 및 전술: 리처드는 전투에서 철저한 대형 유지와 유연한 전술 사용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방패를 앞세우고 그 뒤에 기병을 배치하는 등의 전략으로, 보병과 기병의 조화를 이룬 전술을 통해 많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슬람군의 빠른 기동성과 유연한 전술에 대항하여 적절한 대형을 유지하며 방어와 공격을 조절한 것이 주요한 승리 요인이었습니다.
3. 협상 능력
- 살라딘과의 협상: 제3차 십자군 원정 중, 리처드는 이슬람군의 지도자 살라딘과 여러 차례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을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리처드는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전쟁이 아닌 외교적 협상에서도 리처드의 전략적 사고가 빛을 발한 사례입니다.
4. 군사 조직 및 지휘
- 리처드는 자신의 군대를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엄격한 규율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병참 관리와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전략을 잘 구사했으며, 원정 동안 어려운 상황에서도 병사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했습니다. 그의 리더십과 전투에서의 냉철한 판단력은 그를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하게 만든 요소 중 하나입니다.
리처드 1세의 전략적 능력은 그가 참여한 주요 전투와 원정에서 나타난 전술적 기량, 군사적 지휘력, 그리고 협상에서의 성공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이는 그를 중세 유럽의 뛰어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게 합니다.
하지만 리처드 1세는 대부분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10년간의 통치 기간 중 약 6개월만을 영국에서 보냈습니다. 리처드는 잉글랜드보다는 프랑스의 영토와 십자군 원정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주로 프랑스와 중동 지역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리처드 1세가 영국을 떠나 있었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십자군 원정: 리처드는 즉위 직후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였고, 이 원정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습니다. 1189년부터 1192년까지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중동에서 보냈습니다.
- 프랑스에서의 영토 방어: 리처드는 영국보다 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영토를 더 중시했습니다. 그는 아키텐 공작으로서 프랑스 내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여러 차례 충돌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 포로 생활: 1192년, 리처드는 십자군에서 돌아오는 길에 독일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에게 붙잡혀 1년 이상 포로로 생활했습니다. 그의 몸값을 지불하는 데 엄청난 재정적 부담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영국 내 체류 시간은 더욱 짧아졌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리처드 1세는 영국 내 정치와 행정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부재로 인해 영국 내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여러 정치적 혼란이 초래되기도 했습니다.
-교양유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