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물기원》. 송나라 때의 책으로, 제목처럼 단어의 어원을 추적하며 어디서 온 말인지 찾는 흥미진진한 도서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삼국지 시대에 유래한 어떤 호칭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아주 친숙한 표현이죠.
그 전에, 사물기원의 내용을 가지고 한자 공부 좀 해봅시다.
유양잡조 (酉陽雜俎)에 말하기를,진나라와 한나라 이래로천자는 계단 아래로 말했고,황태자는 전각 아래로 말했고,장군은 깃발 아래로 말했고,사신은 부절을 가지고 수레 아래로 말했고,봉급 2천 석의 고관은 누각 아래로 말했고,부모는 무릎 아래로 말했으니,나으리를 가리켜서 족하足下라고 부르는 것과 작명 방법이 통한다.
이것은 각 호칭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계단 아래(로 말하는 사람) = 폐하

전각 아래(로 말하는 사람) = 전하

깃발 아래(에 있듯이 장군 등 누군가의 아랫사람인 상태) = 휘하

부절의 통솔권을 가진 사람 = 절하(장수. 요즘은 사실상 안 쓰는 사어)
(부절이 뭔지 궁금하다면 이 글을 참조하세요)

곡식(황제를 상징) 아래에서 황제의 명령을 대리하는 사람 = 곡하(사신)
(이건 절하보다 더 안 쓰여서 그런지 사전에도 없고 다른 뜻으로 기록되어 있네요. 의미는 달라도 어원은 같습니다)

(부모의) 무릎 아래 = 어버이의 품, 혹은 그 안의 자식

발 아래에 어쩌고… 이건 별도의 고사성어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라서 넘기지만
아무튼 ‘-하’가 호칭이 되었단 점에선 유사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 왕을 칭하는 ‘전하’가 어디서 유래되었냐면
바로 삼국지 시대의 위나라에서 유래했다고 사물기원은 적고 있습니다.

두습. 위나라의 관료이자 장군.
한중 공방전 때 하후연이 전사해 군율이 붕괴 직전이 되자 사태를 수습한 인물이다.
魏志太祖定漢中杜襲始呼之時操封魏王故襲呼殿下按此自杜襲始也
위지에 따르면, 조조가 한중을 정벌할 때 두습이 처음 이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에 조조가 위왕으로 봉해졌기 때문이다.
전하란 말을 이렇게 쓰는 용례는 두습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이 주장은 제법 신빙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한중 공방전 무렵 두습이 조조한테 ‘전하’란 호칭을 쓰는 것이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216년 위왕으로 즉위하고, 219년 한중 공방전을 겪습니다.
그러니 단순 계산으로 216년부터 219년까지 두습 이외에 다른 사람이 ‘전하’를 먼저 쓰지 않았다면 이 주장은 참에 근접하게 됩니다.
딱 한 사람, 위나라의 대신이었던 유이라는 사람이 조조가 친히 촉 정벌을 하지 않도록 만류하며 ‘전하’라는 표현을 쓴 것이 두습에 앞선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정도 시차면 미적분을 뉴턴이 발명했는지 라이프니츠가 발명했는지 정도의 격차라고 생각합니다.
즉, 왕의 호칭으로 ‘전하’를 사용하게 된 것은 조조의 위나라에서 유래했고,
그 발언자가 두습이냐 유이냐에 따라서 살짝 다르게 볼 수는 있겠습니다.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