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 관상쟁이가 하나 오죠?
삼국지연의는 한 돗자리 장수의 등장으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조조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지 창작물은 카메라를 다른 곳으로 돌리죠.
젊은 시절 조조는 어느 관상쟁이(정사에서는 인물평론가)에게 이런 유명한 평을 듣습니다.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평화롭고 잘 다스려지는 시대에는 유능한 신하로 남을 것이지만, 난세에는 간사한 영웅이 될 것이다.
이 도발적인 예언을 조조는 무척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저 문장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한 삼국지 독자가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 있다면 다른 경우도 있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치세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없지만 난세에는 유능할 수도 있죠.
한 고조 유방이나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모두 평민 출신이었으니,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을 판이 깔려있지 않을 때 태어났다면 밭을 갈다가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삼국지 인물 중에선 유비도 영영 돗자리 상인 신세였을지도요.
반대로 누군가는 평화로운 시대에 어울리나 난세엔 적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유표는 삼국지 속 그런 인물의 대표격이라 할 만합니다.
정사 《가후전》에 따르면, 가후는 장수(장제의 조카)에게 유표의 인물됨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표는 태평한 시대의 삼공에 어울리는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를 보지 못하고, 의심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난세에는) 무능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표의 노련한 면모를 보면 그도 결코 호락호락한 군벌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조조 같은 난세 특화형 인물에 비하면야 가후의 평이 대체로 적절하겠습니다.




물론 치세에서도 난세에서도 무능한 인물도 있겠고요.
정리하면 치세/난세, 유능/무능에 따라 네 가지 매트릭스로 삼국지 인물의 유형을 분류해볼 수 있겠습니다.
치세 O / 난세 O (조조)
치세 O / 난세 X (유표)
치세 X / 난세 O (유비)
- 치세 X / 난세 X (이병건)
이 글에서 다뤄볼 인물은 3번에 해당하는 위나라 사람인데,
유표 못지 않게 3번의 대표가 될 만한 인물입니다.
단 한 번도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 등장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 비록 생소하지만 힙한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거지 황제의 공신

이각과 곽사의 쓰레빠 축구 심판이나 보던 헌제.
처량한 꼴을 당하던 헌제는 태위 양표의 주도 하에 탈출하여 동쪽으로 향합니다.
다른 군벌이 미적거리는 틈에, 천자의 가치를 알아본 조조는 재빨리 황제를 확보하여 허도에 (볼보이로) 모시게 되지요.
이것이 이른바 ‘협천자’.
황제를 자신의 본거지에 둔다는 것은 곧 황제의 이름을 빌려 무엇이든 자기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으로,
조조가 누군가를 지목해 역적이라 하면 즉시 역적으로 규정되며, 반대로 모 아무개를 어느 벼슬에 임명하고 싶으면 조서를 써 임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후한 조정의 권한을 합법적으로 장악했다는 엄청난 어드밴티지를 얻었으니,
이 협천자의 선택은 삼국지 내에서 아주 중요한 결단의 순간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조조가 협천자를 주도한 것은, 결과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선택이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딱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어떻게 무늬만 황제 측근인 이 거렁뱅이 무리를 먹여살릴 것인가?’
였습니다.
이각과 곽사는 헌제를 다시 되찾아오려면 방해하는 모든 적들을 거침없이 살해하고도 남을 인물들이었기에,
헌제의 탈출길은 매우 험난하였는데…
영집장군 단외段煨는 이에 의복과 수레를 갖추고 또한 공경 아래로는 재물을 마련하여, 황제가 자신의 군영에 오기를 청하였다.
당초 양정은 단외와 더불어 틈이 있었는데, 드디어 단외가 배반하고자 한다고 무고하여, 이에 그 군영을 공격하였고, 십여 일 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다.
- 후한서 동탁전

구 동탁 부하로, 동탁 밑에 있던 장군들 중에선 가장 인성과 평판이 좋았던 인물인 ‘단외’가 천자 피신에 합류하지만
구 곽사 부하였던 장군 양정이 단외를 시기한 나머지 제멋대로 단외를 공격하는 내분이 발생하는가 하면,
(삼국지8 리메이크 이각전에서 방장이 왜 자기를 죽인 사람이 같은 도시에 배치돼있냐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그 사람이 이 단외입니다)
백관과 사졸 가운데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모두가 아내도, 수레도, 황제의 물건도, 책도, 법전도 버리고 도망치니 약탈할 것이 넘쳐났다.
- 후한서 동탁전
황제를 호위하던 양봉과 동승이 추격군에게 대패하면서 군율을 잃고 완전히 무너지기도 하고,
천자가 조양曹陽에서 노숙하였다.
동승, 양봉은 이에 이각 등과 화해할 것으로 속이고, 은밀히 하동河東에 밀사를 보냈다.
옛 백파적 수령인 이락李樂, 한섬韓暹, 호재胡才, 남흉노南匈奴 우현왕右賢王 거비去卑가 함께 그 무리 수천기騎를 거느리고 왔다.
- 후한서 동탁전

(한섬. 황건적의 한 분파인 백파적의 우두머리 중 한 명)

(어부라. 남흉노의 선우)
오죽 도와줄 사람들이 없어 급박했으면, 황제가 황건적 잔당에 흉노까지 끌어들여 호위 병력을 마련해야 했고,
이때 전투에서 또 패배하자 호분과 우림 백여 명은 모두 역심을 품었다.
(중략)
서로 배에 올라타려고 다투는데 도저히 막을 수 없자, 동승이 창을 집어들어 찍으니 배 안엔 손가락이 잘려나간 자가 한 무더기였다.
- 후한서 동탁전

심지어 (연의에선 유비와 함께 의대조 밀사라서 충신 이미지뿐인) 황제의 외척 동승에게도 무척 살벌한 일화가 있습니다.
황제의 근위병들에게 반란 분위기가 확연한 가운데 몰래 배를 태워 황제를 호종하려다가,
뒤따라 타려는 일행이 너무 많아 질서가 무너지고 누가 반란분자이며 누가 충신인지 구분이 안 가는 상황에서 배에 타려는 사람들을 직접 창으로 떼어내 죽인 것이죠.
여기까지 보고 생각해 봅시다.
이런 생고생을 거쳐 온 피난 행렬을 맞이한다는 것은 냉정히 말해 군식구가 늘어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일반 백성들 먹이듯 할 수도 없고,
엄연히 현직 황제(구 쓰레빠심판)인데 때깔이 고운 식사를 차려주지 않으면 안되는 노릇일 텐데,
당시 조조도 자기 군사 밥 먹이는 데 바쁜 만큼 그렇게까지 여력이 풍족하지가 않습니다.
즉, 협천자가 차후에 가져올 결과적 이득은 어마어마하지만 당장의 편익을 따지면 망설여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연주에서 군대를 움직여 천자를 맞이하는 데 발생하는 호송 비용에 기타 접대비 등등을 포함하면,
그것이 아직 군소 군벌이었던 조조 입장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볼 때 영 뻑적지근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래서 이때 헌제에게 공물을 바친 하내태수 장양이나 하동태수 왕읍 같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적선이 매우 중요했죠.
(적시에 식량과 비단을 마련해준 공으로 장양은 대사마, 왕읍은 제후가 되었으니 엄청 남는 장사였습니다)
이때 또 한 사람, 조조의 도움이 되어주는 한 관리가 등장합니다.

양패 字 공거(?~?)
흥평(興平: 194-196) 말년에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일 때 양패는 뽕나무의 열매를 따서 말리고 야생의 콩을 걷어 들이도록 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의 것으로 부족한 사람의 것을 메우게 하여, 이렇게 해서 모두 천여 석을 모았고 작은 창고에 넣어 저장했다.
조조가 연주자사(兖州刺史)로 있을 때 천자를 영입하였고, 이때 조조의 1천여 명의 병사들은 모두 먹을 것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들이 신정 마을을 통과할 때, 양패가 조조를 만나, 이내 곧 마른 뽕나무 열매를 모두 바쳤다. 조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 삼국지 양패전
바로 신정현이라는 작은 현의 현장을 지내고 있던 양패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진정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은 은혜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은 조조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만큼(여백사 : ?),
이후 양패는 조조군에서 화려하진 않지만 중요한 인물로 자리잡으며 인상적인 일화를 몇 가지 남기게 됩니다.
- 양패의 조조군 시절 활동은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