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첫 직장에서 첫 월급을 받았다.
비록 정규직이 아닌 인턴 신분이었고, 살면서 돈을 벌어본 경험이 전혀 없던 것도 아니었지만, 직장인으로서 받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 달을 모두 채우지 못해 원래 금액보다 적었지만, 부모님께 선물을 드리고 형네 부부에게도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나도 셔츠 몇 벌을 샀다. 그 외에는 딱히 쓸 곳을 정해두지 않았다.
며칠간 어떻게 써야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러던 중, 문득 “기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가능하다면 보육원 같은 시설에 직접 기부하고 싶었다. 시기도 적절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니까.
30만 원? 100만 원? 고민 끝에 적당히 타협하여 50만 원으로 결정했다. 그렇게 50만 원을 기부했다. 어린이날 선물 구매에 쓰였다는 감사 인사도 받았다.
하지만 그 기부는 진심으로 타인을 위한 것이기 보단, 나 자신을 위한 행위였다. 나에게 기부는 그저 '첫 월급을 의미 있게 썼다'고 포장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물론, 그 돈이 기왕이면 좋은 곳에 쓰이기를 바라기는 했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어린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 “첫 월급은 어떻게 썼어?”라고 물을 때, “응, 기부했어”라고 답하며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선행을 베푸는 ’고상한 존재’로 여겨지길 바라는 그런 모습이었다.
위선도 선일 수 있을까?
우리는 때때로,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착한 일을 한다. 나는 그런 편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혹은 ‘스스로를 조금 더 견딜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선행을 베푼다. 순수한 동기란 존재할까? 혹은, 순수하지 않은 동기에서 비롯된 선행은 그 가치가 줄어드는 걸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은 반복된 행동과 습관을 통해 길러진다고 했다.
즉, 처음에는 어색하고 계산적일지라도, 반복되는 선행은 결국 인간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순수한 선의 출발은 희귀하다. 그러나 불완전한 동기라도 행동으로 이어졌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반면, 칸트는 선한 행위는 ‘순수한 의무감’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엄격한 기준으로 보면 나는 실패한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늘 복합적인 욕망과 감정 안에서 움직인다.
누군가는 이런 나의 생각들을 두고 “호들갑. 기부 좀 했다고 호들갑”을 떤다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인생은 그런 서툰 호들갑들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호들갑을, 부끄럽지 않게 껴안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