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사는 크게 대사, 중사, 소사 세 종류가 있고
그중 종묘에서 지내는 것으로 사대향과 납일제, 천신제, 삼대향 그리고 고유제가 있습니다.
사대향(四大享)은 말 그대로 네가지 큰 제물을 바치는 일로 음력 정월, 4월, 7월, 10월 상순(사맹삭)에 행해졌는데
지금도 사가에서 2월,5월,8월, 11월에 사시제를 지내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납일제(臘日祭)는 동지 이후 세번째로 오는 미일(O未日)에 지낸 제사이고 둘을 합쳐서 오향대제라고도 합니다.
천신제(薦新祭)도 말그대로 매 월 그 달의 햇과일이나 햇곡식 등 신물(新物)을 바치는 바치는 것이구요
천금제(薦禽祭)는 천신제의 일부였지만 독립해서 매 봄과 가을, 농한기에 사냥과 훈련을 겸한 강무(講武)에서 잡은 짐승을 천신하는 것입니다.
정전이 아닌 영녕전에서 지내는 것으로 납일제와 중춘, 중추의 무일(戊O日)에 지내는 두 제사를 합쳐 3대향이라 합니다.
고유제(告由祭)는 말그대로 자식을 생산하였든, 환갑이 되었든, 비가 오지 않던 어떤 이유가 있을때 고하러 가는 것입니다.
속절(俗節)은 명절에 지내는 제사로 정조(正朝, 정월 초하루 아침), 한식, 단오, 중추, 동지 그리고 상원(上元,정월대보름.) 중원, 칠석, 중양등이 추가됩니다.
--↑안읽어도됨↓ 별내용 없음 --
제사가 사라지는 지금 풍속으로 보아선 정말 쓸데없어 보이지만은
지금도 민주공화국의 제일 큰 의례인 선거에 대통령이 의례 그 투표에 참석하듯이
당시 사람들은 왕은 인리의 모범이자 천도의 주재자로서
그 왕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천지가 조응하지 않는 임무같은 것이라 생각한 것이지요.
아무튼 참 많기도 한데요
저건 국가의 사당에서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이고
요즘 하듯이 묘지에 가서 하려고 하면
우선 백성도 힘들구요 신하들도 힘들구요 왕은 분신술에 철괴도 써야합니다.
유교에선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간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혼을 모신 사당인 종묘에선 왕이 친향을 하고
백을 모신 묘지인 산릉(山陵)의 제사는 속제(俗祭)라해서.
신하를 보내 섭행토록 합니다.
그 대신 조상님이 섭섭할 수 있으니까 왕이 쓴 제문을 보내어 읽게 합니다.
사시와 명절뿐만 아니라 현대의 기제사인 기신제는 원래 능묘가 아닌 경복궁의 문소전에서 지내도록 했지만
임진왜란으로 문소전이 불타면서 왕릉에서 지내게 되어 자연스레 조선후기엔 친향이 늘어나게 됩니다.

또한 임금이 궁을 떠나 릉으로 가는 절차를 배릉의拜陵儀라고 하는데요
특이하게도 이 배릉의에선 다른 제사가 축시에 하도록 정해져있는데 반해 그 시간을 규정하고 있진 않습니다.
이는 능행이란 것이 앞서 말했듯 백성도 신하도 임금도 고달파지는 일이지만
혹시라도 변고가 생긴다면 참 곤란해지기에
국왕이 도성의 문에서 나와 이동하는 만큼 하나의 군사작전으로서 길을 확보하고 척후를 보내고 사고에 대비하는 등
왕의 시위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기에 현실적인 여건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능행이란 항상 국왕이 목적을 가지고 행해지는 일이었습니다.
효종은 차자로서 국왕의 정통을 과시하면서도 북벌을 위한 군사훈련으로 이용하여 그 호위군이 2000명이 넘었고
과격하게 정국을 주도했던 숙종은 6400명의 대부대를 이루며 위용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도성을 나가 능행차 하는 일은 아무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왕들은 한 번 나가면 한번에 많은 곳에 들르려 했고

선후는 불명하지만 풍수적으로도 명당은 드문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왕릉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강북에 집중된 것은 군대를 이끌고 한강을 자주 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능행을 위해 도성을 나간 횟수는 211회인데
들른 능은 900여개가 넘고, 왕릉이 아닌 원이나 묘를 포함하면 더욱 많아집니다.

특히나 태조를 비롯해 영조, 문조(효장세자)가 묻혀있는 동구릉이 그 횟수가 많고.

정치적 소용돌이가 일은 시대였던 영조는 특히나 선친의 묘소인 서오릉에 많이 들렀습니다.

또 영조는 특이하게도 서오릉에 들른 후에 저 멀리 파주에 있는 어머니 숙빈최씨의 묘 소릉원에 들리기도 했죠.
그러나 현대에 능행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무엇보다 바로.

정조대왕 능행차입니다.
당시엔 지금처럼 융릉이 아닌 현륭원이었지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년 빠지지 않고 뵈러 갔는데요.
1776년 즉위 직후 친부의 존호를 장헌으로 하고 그 묘인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상시키고 생일인 음력2월에 매년 방문을 하였습니다.
영우원은 회기역 인근인 삼육대학교 병원에 위치하여 창덕궁에서 멀지 않았지만.
1789년 수원으로 천릉하고 이름을 현륭원한 후에도 마찬가지로 매년 음력2월 묘를 찾았고, 이는 죽기 전에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정은 보통 3일~5일 정도 걸렸습니다.
정조는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수원 화성의 서장대에 올라 군사를 직접 지휘하기도 했는데요.
이를 위해 정조는 군사가 한강을 건너 능행차 하기위한 배다리를 전담하는 주교사(舟橋司)를 상설기구로 두기도 하였습니다.


산릉친제의 과정은 전알-봉심-작헌-(독촉)-사릉으로 이뤄지는데요.
1. 왕이 시위와 의장을 두고 대차로 이동하고 홍문 앞에서 내린 후 왕을 수행하는 최소인원이 어로를 따라 소차로 이동하고,
준비가 되면 소차에서 왕을 인도하려 정자각의 판위에서 서향으로 사배례 후(전알)
2. 왕이 능에 나아가 능을 살펴본 뒤(봉심)
왕이 향을 세번 올리는 삼상향을 한 뒤 술을 올리는 작헌이 이루어지는데 초헌은 국왕이 직접하고 판위로 이동한 뒤
그 다음인 아헌과 종헌은 각 종1품 이상 관료들이 헌관으로 참여하고.
종헌이 끝나면 다시 사배례 한 뒤 왕은 소차로 이동하고 신하들도 순서에 따라 퇴장한 후에
왕은 소차에서 홍문을 지나(사릉) 대차로 이동하여 참포를 벗고 곤룡포를 입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차는 후에 능이 많아지는 후기에 이르러선 왕릉군에 한 명만 보고 갈 수 없으니
부차적으로 다른 왕릉은 홍문 근처에 판위를 두고 전알과 사릉만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침착맨 궁금한거 요약
기제사 - 기신재는 불교적 요소로서 세종대 원묘로서 4대를 모신 문소전으로 정리하고 지냈는데
중종대 유교식인 기신제로 대체되었고 이후 문소전이 왜란으로 불타면서
문소전 친향은 사라지고 부모 정도만 능행친제함.
전문 제사팀 - 예조, 봉상시, 능참봉.
임금이 여러개 가야되지 않냐- 루트를 잘 짜야하고 오브젝트도 모여있음
임금이 일을 해야하지 않냐- 능행이 일임, 근데 안하기도함 크크루삥뽕
참고문헌
“조선시대 능행 연구 용역 보고서”
“조선시대 능행 심화 연구 용역 보고서”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의 서례”
https://gimpomunhwa.or.kr/html/site/gimpo/munhwa/17th/page_21.html#_ftn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