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악 또는 악마의 개념을 개괄하는 전체 4권의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의 저자 제프리 버튼 러셀(Jeffrey Burton Russell)은 20여 년 동안 인류의 문명사에서 악의 문제를 줄기차게 탐구해 왔다.
종교개혁과 뒤이은 합리주의의 대두로 중세의 권위를 잃은 악마는 19세기에 이르러 특권층에 대한 반항의 상징이자 인간에 타락과 어리석음을 야유하는 메타포가 되었고, 20세기에 일어난 대량살육은 악마를 신학적, 철학적 관점에서 다시 고찰하는 계기가 됐다.
러셀은 객관적인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악과 악마의 개념을 추적했으며, 그가 참조한 분야는 신학과 철학, 문학, 미술 더 나아가 대중 예술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연구의 폭과 깊이를 넓혀나갔다.
명실상부하게 인간이 손댄 모든 분야의 이면을 뒤집어, 문명과 문화의 참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낸 것이다.
네 권의 저작을 통해서 러셀은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악마의 구체적인 개념을 천착함으로써 규명하고자 했다.
고대로부터 기독교 시대, 그리고 중세를 거치면서 악의 상징은 그 시대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변용되어 왔다.
전권을 통해서 저자는 가장 극명한 악의 상징들이 역사 속에서 변용되어 온 과정을 파고들면서도 탐구의 대상들이 단순히 학문의 영역으로만 제한되지 않고 인간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는 엄연한 현실임을 줄곧 강조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초기 기독교, 중세와 근대를 아우르는 러셀의 지적 여정은 이전에 단편적으로 또는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악과 악마에 관한 문헌과 지식들을 총망라한 셈이다.
빛이 그 밝음을 더할수록 그 이면엔 더 짙은 어둠이 드리워지는 법.
그저 멀리하며 들여다보기 꺼려했던 인간 역사의 다른 한쪽이 드러나면서, 비로소 인류 문화사는 온전한 양 날개를 펼치게 되었다.
두려움과 무지가, 역사적 문맥과 지성으로 진실을 밝혀보려는 용기를 통해 극복된다면, 러셀의 이 도저한 작업은 우리에게 문명을 이해하는 균형감각을 갖게 해 주리라 생각한다.
이 시리즈는 이미 20세기 지성사의 중요한 부분을 채우는 필독서로 자리매김한 바 있다.
목차
서문
1. 악의 문제
2. 악마를 찾아서
3. 동서양의 악마
4. 고전 세계에서의 악
5. 히브리적인 악의 인격화
6. 신약성서에 나타난 악마
7. 악마의 얼굴
본문의 주
참고문헌
역자후기
찾아보기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악을 경험한다.’ -데블:13p.
악이란 무의미하고 분별없는 파괴 행위다. 악은 파괴하지만 건설하지 않는다. 악은 허물지만 재건하지 않는다. 악은 잘라낼 뿐 서로를 이어주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악은 모든 것을 절멸시키고 무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모든 존재를 취해 무(無)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악의 본질이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처럼, 악이란 “생 그 자체를 적대시하는 생”이고 “죽고 썩어가며, 생명력이 없고 순전히 기계적인 것을 끌어들인다.” -데블:22~23p.
나는 악마가 실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존재를 형이상학적인 실재라고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실재는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다.……만일 인간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실재한다고 규정하면, 그러한 상황은 결과적으로 실재하게 된다.” 어느 순간에 나는 악마라는 존재는 악마라고 하는 개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악마가 개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악마는 (개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실재는 그러한 현상-정신적 구성물-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지식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악마는 실재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악마는 실재한다. -데블:49p.
그리스와 헬레니즘적인 경험은 악마라는 개념의 전통이 발전하는 데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었는가? 그리스인들은 최초로 우주를 합리적으로 탐구해서 철학을 낳았으며 다시 철학을 신에게 적용해서 신학을 낳았다. 따라서 신정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신화적으로 덮이지 않고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반성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선과 악에 대한 보편적이고도 도덕적인 견해를 얻게 되었다. 신들과 인간들, 그리고 그들을 넘어 심지어 신 자신도 따르도록 되어 있는 보편적인 행위의 표준이라는 것이 있었다. 만일 신이 어떤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의 자의적인 기분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본질적으로 악이었기 때문이다. -데블:217p.
이 종말론적인 신정론이 가지고 있는 중대한 문제점은 프라이데이가 로빈슨 크루소를 당황하게 했던 질문과 같은 것이다. 만일 주께서 악마를 멸망시킬 권능을 가지고 있고 그를 멸망시키고자 했다면, 왜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까? 이 질문은 늘 신학자들을 괴롭혀왔다. 신은 왜 그렇게 엄청난 악을 허락했을까? 신이 다른 영에게 자신의 도움으로 파괴를 허락하고 심지어 권한을 부여했다면, 신은 그 파괴 행위에 대해 책임이 없는가? 신은 궁극적으로 그런 일을 스스로 원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 져야 할 책임을 무마해보려는 히브리인과 예언서 시대의 유대인이 벌인 노력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뿐이었다. 마스테마가 하는 것이면 야훼도 한다. -데블:261~262p.
나는 이 책을 통해 형이상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역사적인 용어로 말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노력해왔다. 역사학자로서 나는 하나님의 정신이나 악마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었고, 악마의 객관적인 존재를 문제 삼지 않고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악마의 개념을 연구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를 학문적으로 조사하려면 방법론적인 관점에도 도덕적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또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어쩔 수 없이 내 자신의 결론을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고 믿는다. -데블:327~32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