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는 유료로 해줍니다
때는 바야흐로 2007년,
음악을 담아내는 매개체로서의 CD의 시대는 점점 저물어가고
MP3로 대표되는 디지털 음원이 부상하게 된 때,
라디오헤드(Radiohead)는 그들의 7집 앨범 <In Rainbows>를
파격적인 방식으로 발매하게 됩니다
음원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할 수 있으니
감상자가 원하는 만큼 값어치를 지불하는 방식이었죠
기성의 음반 판매의 수익 분배 구조가 불합리하고
아티스트들의 창작 정신을 거스른다고 여겼는지
라디오헤드는 기존 회사와의 계약이 종료되자마자
인디 레이블로 들어가 이러한 도발적 판매 방식을 감행했죠
우리가 알아서 우리 노래를 팔 테니까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수요자와의 직거래를 통해
음악의 값어치를 제대로 매겨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디지털 다운로드나 스트리밍이 흔한 요즘이지만
17년 전에 등장한 이런 판매 방식은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장기하와 얼굴들도 영향을 받아서
싱글 “좋다 말았네”를 <In Rainbows>와 같은 방식으로 판매했죠
라디오헤드는 전작에 비해 많은 수익을 얻었지만
전체 구매자의 60% 가량이 단 0파운드에 음반을 구매(?)했고
장기하의 싱글 역시 전체 구매자의 40% 가량이 0원을 지불했죠
두 사례 모두 좋다 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라디오헤드는 8집부터 기존 판매 방식으로 회귀합니다
라디오헤드의 사례에서 영감을 얻은 나인 인치 네일스는
2008년작 정규 앨범 <The Slip>의 모든 곡을
온라인 다운로드를 통해 공짜로 풀어버리는 실험을 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의 팬들의 사랑과 충성에 감사드리며,
이 앨범은 제가 쏩니다."라는 나인 인치 네일스의 수장
트렌트 레즈너의 커멘트와 함께 말이죠
한 술 더 떠 이들은 앨범 전곡에 DRM-Free와 함께
크리에이티브 커먼 라이선스를 적용하는데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조건으로
구매자들이 자기 블로그에 마음대로 올린다든지
돈 받고 팔지만 않는다면 2차 창작을 하는 것도 허가합니다

물론 나인 인치 네일스도 라디오헤드의 사례도 있고
최소한의 먹고 살 만한 구석은 확보해야 한다고 여겼는지
실물 앨범 CD는 유료로 판매합니다
단, 25만 장만 찍어내는 한정 판매로 말이죠
어쩌면 CD를 팬싸인회 참석권 내지 굿즈로 여기고
음악은 스트리밍으로 이용하는
오늘날의 음악 소비 방식과 비슷해 보인달까요
그런데 이 앨범 제작에 참여했던 한 남자가
이 앨범의 판매 방식에 영감을 얻어
2009년에 자신의 솔로 앨범을 팔려고 합니다
참고로 그는 저 위의 “Letting You” 라이브 리허설 영상에서
드럼을 쎄빠지게 치고 있습니다

이 남자는 완전 공짜로 자신의 앨범을 팔기는 좀 그랬지만
소비자의 수요를 최대한 고려한 듯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음악을 판매하는 전략을 짭니다
그리하여 무려 11가지의 금액을 매겨서 앨범 하나를 파는데,
그 자세한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굉장히 길기 때문에 스킵하셔도 됩니다)
★ 7달러 : 뮤직비디오 3개 포함 앨범 전곡 다운로드
★ 15달러 : 디지털 다운로드권 포함 CD/DVD 세트
★ 50달러 : 음원 다운로드 + CD/DVD + 티셔츠
+ 이 남자와의 5분간 전화 인터뷰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 250달러 (25개 한정) : 50달러 구성품
+ 친필 사인 드럼스틱과 드럼헤드
+ 이 남자와의 점심식사권 제공
★ 500달러 (15개 한정) : 50달러 구성품
+ 친필 사인 심벌&스틱
+ 이 남자와의 감각 차단 탱크 체험 (유튜브 업로드 가능)
+ 이 남자와의 저녁식사권 (새우 무한 리필 및 스테이크 제공)
★ 1,000달러 (10개 한정) : 250달러 구성품
+ 이 남자가 세차 혹은 빨래해줌 (이 남자의 차를 세차해도 됨)
+ 이 남자와의 저녁식사권
+ 술에 쩔어서 법원 앞 주차장에서 서로의 머리카락 잘라주기
(유튜브 업로드 가능)
★ 2,500달러 (5개 한정) : 15달러 구성품
+ 친필 사인한 스네어 드럼 한 개 동봉
+ 이 남자의 드럼 레슨 수강권
(구매자가 드러머가 아니면 이 남자가 마사지 해줌, 커플 환영)
+ 이 남자의 소속 밴드 멤버 중 한 명과 함께
밀랍 인형 박물관 관람 또는 뷔페에서 점심식사
+ 선착순으로 이 남자의 옷장에서 옷 세 벌 획득 가능
+ 이 남자의 막내 애 기저귀 갈기 및 점심 분유 타 먹이기
(새벽까지 스트립 클럽 방문 후)
★ 5,000달러 (3개 한정) : 50달러 구성품
+ 이 남자가 구매자를 위해 곡을 쓰고 iTunes에 등록
+ 구매자를 주인공으로 한 뮤직비디오 제작 및 유튜브 업로드
+ 동반 1인 디즈니랜드(이 남자의 전 직장) 구경시켜 줌
+ 같이 술 한 잔 하기 또는 이 남자의 아버님 댁 방문
+ 펄 잼(Pearl Jam)의 기타리스트 스톤 고사드에게서
이 앨범의 감상에 대한 편지를 받아볼 수 있음
★ 10,000달러 (1개 한정) : 50달러 구성품
+ 어 퍼펙트 서클(A Perfect Circle) 공연 때 썼던
스네어 드럼에 친필 사인 후 증정
+ 이 남자의 드럼 레슨 수강권
(혹은 이 남자의 마사지 제공, 커플 환영, 주차 완비)
+ 소속 밴드 어 퍼펙트 서클의 베이시스트와 함께
구매자의 동반 1인 포함 저녁식사권
+ 동반 1인과 함께 전 직장이었던 디즈니랜드의
프라이빗 레스토랑 식사권 및 각종 어트랙션 체험 기회
+ 디즈니랜드 방문 후 이 남자의 중고 볼보 웨건 시승권
(차는 구매자가 가져도 됨, 단 이 남자 집에는 데려다 줘야)
★ 20,000달러 (1개 한정) : 50달러 구성품
+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 공연 때 썼던
드럼에 친필 사인 후 증정
+ 어 퍼펙트 서클의 보컬 메이너드 제임스 키넌과
디보(DEVO)의 보컬 마크 마더스버와 함께
미니 골프 한 게임 후 집에 가는 길에 떨궈줌
(이 모든 과정을 유튜브에 업로드 가능, 일정은 유동적)
+ 이 남자가 처음 세 들어 살았던 아파트 방문 및
데이브 그롤이 너바나(Nirvana)에 합류하기 2주 전에
타일 해체 알바 하고 40달러를 받았던 커피숍 방문
이 남자의 첫 밴드 반달스(The Vandals)의 옛 연습실 방문
이 남자가 17세 때 반달스 멤버 신분증 빌려서
술 사려다가 들통 났던 주류 판매점 방문
스눕 독(Snoop Dogg)의 모교 방문
(추가 금액 지불 시 명승지 더 구경 가능)
+ 롱 비치의 해상 호텔 퀸 메리 호 1박 숙박
(방 따로 씁니다, 잘 때 안 껴안으니 걱정 마셈)
+ 이 남자가 당신을 위해 두 곡을 써서
iTunes에 올리고 다음 앨범에도 실을 예정
이 노래에 드럼을 치든, 코러스를 넣든
박수를 치든 트라이앵글을 치든 제작 참여 가능
+ 이 남자의 드럼 레슨 수강권
(혹은 이 남자의 마사지 제공, 커플 환영, 주차 완비)
★ 75,000달러 (1개 한정) : 50달러 구성품
+ 이 남자와 함께 며칠 동안 관광
+ 이 남자가 오로지 당신의 이야기만 담은 다섯 곡을 써서
향후 EP로 발매
+ 이 남자의 드럼셋 중 아무 아이템 하나 획득 가능 (다는 안 됨)
+ 환각 버섯 체험 및 툴(Tool)의 드러머 대니 캐리가 소유한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에 탑승 후 헐리우드 드라이브
(혹은 술 게임을 한 후에 위자 보드 하면서 놀기)
+ 구매자가 밴드를 한다면 이 남자가 한 달 간 드러머가 되어줌
(곡도 쓰고, 공연도 하고, 뭐 그루피랑 놀 수도 있고…)
+ 구매자가 밴드를 하지 않는다면 이 남자가 개인 비서가 됨
(주 4일 근무,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근무 시간 준수)
+ 리무진을 타고 미-멕 접경지 티후아나에 가면 어떻게 되는지
체험 기회 제공 (법적으로는 금지된 일이긴 함)
+ 구매자가 남가주 외 미국에 거주 시
이 남자가 구매자의 집에 직접 방문 후
2주 동안 구매자의 비서 및 짐꾼 노릇을 함
+ 나인 인치 네일스의 기타리스트 로빈 핑크와 함께
그의 아내(태양의 서커스 단원)에게서 공중 그네 강습
이후 그의 집에서 그의 아내가 해주는 라자냐로 저녁식사
앨범 하나 파는데 이게 뭔 뇌절인가 싶겠지만
이 다양한 판매 방식은 생각보다 잘 먹혔습니다
점심식사권이 제공된 250달러 패키지는 완판을 했고
3개 한정 5,000달러 패키지는 2개가 팔렸으며
심지어 20,000달러 패키지를 구매한 고객도 있었습니다
고객 만족도 또한 굉장히 좋았습니다
50달러 패키지를 구매한 한 고객은
5분도 아닌 15분씩이나 집안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5,000달러 패키지를 구매한 고객은
이 남자와 함께한 추억의 순간이 곡으로 만들어져
실제로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영광(?)을 입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앨범 상품 구성 내역을 뜯어 보면
펄 잼, 너바나, 나인 인치 네일스와 같은
이름 난 뮤지션들과 연을 맺는 것도 가능한데요,
이 남자가 커리어를 통틀어 400개가 넘는 앨범에
세션 드러머로 참여한 마당발이었기에
이러한 판매 전략이 정말로 실현 가능했습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조쉬 프리즈(Josh Freese)
그는 청소년 때부터 디즈니랜드의 커버 밴드에서
드러머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고
데뷔 밴드인 코미디 펑크 밴드 밴달스와
전위적인 음악을 하는 뉴웨이브 밴드 디보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2010년대 이후로
위저(Weezer)나 패러모어(Paramore)와 같은
밴드의 라이브 공연 드러머로 참여했으며
재작년에 세상을 떠난 테일러 호킨스의 뒤를 이어
푸 파이터스(Foo Fighters)의 라이브 드러머로 합류했습니다
(위 글은 다음 기사들을 출처로 작성하였습니다)
https://www.theguardian.com/music/2009/feb/23/full-list-josh-freese-album-package-deals
https://www.wired.com/2009/03/sold-mini-golf/
아, 이 남자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과 4집에서 드럼을 친 걸 깜빡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