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노인공격 해서 쓰레기 될 뻔한 경험
안녕하세요.
실수야 우리 인생에 지천으로 널려있지만, 기억에도 진하게 남아 있고 코쓱 훈훈해진 결말로 끝난 지하철 노인공격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그림 실력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때는 바야흐로 2008년 초여름
경기도 모처에 살던 저는 수원에 있는 모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종강을 맞아 얼른 너네 동네로 가서 신나게 달리자는 동기들과 함께 이제 막 플랫폼에 들어온 전철에 헐레벌떡 올라탔더랬죠.

더운 날씨에 전철 안은 매우 시원했고, 비교적 자리가 한산했기에 얼른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탑승한 칸에는 운명처럼 딱 우리 세 명이 앉을 세 자리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쾌재를 부르며 앉아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열차가 문을 열어놓은 상태에서 플랫폼에 잠시 정차해 있었고 바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할머님께서 전철에 타게 되었죠.
딱 보기에도 많은 짐들을 들고 계셨고, 땀도 뻘뻘 흘리고 계셨기 때문에 당연히 ‘누군가 자리 양보해주겠지’라는 생각에 신경을 거두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아무도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고 결국 할머님은 우리가 앉아있는 앞자리까지 오셨습니다.

저를 분노케한 것은 같이 앉아있던 동기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다 떨기 좋아하던 놈들이 글쎄 이어폰을 꽂고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당장이라도 일어나 불꽃 같은 할렘사이드킥을 사이좋게 한 방 씩 찍어주고 싶었지만 저는 공공기관에서 예의범절을 잘 지키라는 교육을 받은 한솔유치원(가명) 출신이었기에 분노를 삭히고 할머님께 자리를 비켜드리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동기들은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자는 척 중…
할머님은 저와 서 너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고등학교 시절 친절 봉사의 RCY 출신이었던 저는 할머니를 모셔와 자리를 안내해드렸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할머님께서는 거듭 감사하다 하시며 무거운 짐들과 함께 힘들게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셨죠.
그렇게 자리에 앉으시기 위해 자세를 잡으시던 그 순간!!!

그 뭔지 아시죠?
전철이 이제 막 출발 할랑말랑 하는 그 순간에 앞으로 살짝 가려다가 멈추고 다시 출발하는 그런 순간!
얄궂게도 이 때부터 운명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님이 중심을 잃고 제 쪽으로 넘어지려 하시기에 저는 20살의 놀라운 반응속도로 자세를 취했습니다!
위와 같이 저의 두 팔로 할머님의 양 팔을, 그리고 혹시라도 낙법을 익히시지 않아 엉덩방아를 찧으신다면 후두부가 바닥에 강하게 부딪힐 수도 있었기에 등 쪽을 받히기 위해 무릎을 살짝 세웠습니다!
정말 든든하지 않나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할머니의 후두부를 직격한 것은 전철의 바닥이 아닌 저의 날카로운 Knee였습니다…
그 소리가 생각보다 굉장히 컸기 때문에 저는 물론, 피해자인 할머니와 전철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릴 정도였죠…

전철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이러려고 태권도와 무에타이를 배웠었나, 사실 난 인간병기가 아니었을까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어쨋든 할머님을 일으켜 세워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머리가 복잡해진 저는 처음 전철을 타던 순간부터 할머님이 버거워 하시던 가방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님이 일어나실 때 타이밍 맞춰서 가방을 들어드려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죠.

할머님과 저는 따로 팀워-크를 다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일어나시는 타이밍을 못 맞추게 되면서 제가 가방만 번쩍 들게 되었고 할머님은 가방에 대롱대롱 매달린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짝사랑하는 친구를 놀리기 위해 책가방을 위로 들어올렸을 때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놀렸던 학창시절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전철의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또 들었습니다.
할머님께서는 연신 괜찮으시다며 혼자 일어날 수 있다고 하셨던 것 같지만 당황한 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몸부터 부축하고 일으켜드렸어야 했음을 생각해낸 저는 다시 할머님을 도와드리기 위해 다가갔습니다.
더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죠.

45º 우측면에서 자연스럽게 오른팔과 왼어깨를 잡고 도와드려야겠다 싶었지만 운명은 저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실수와 수많은 사람들의 눈총에 삐걱대던 몸은 또 한 번 사고를 치고 맙니다.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으신 할머니의 손을 밟고 만 것이죠.

분명 에어컨은 시원했건만, 저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있었습니다.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동기들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주춤주춤 출발한 기관사님이 미웠으며, 무엇보다 뚝딱거리는 저 자신이 너무나 싫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여자저차 다시 일어나신 할머님을 부축해 자리에 앉혀드렸고 수많은 난관을 헤쳐나온 것 때문일까 할머님도 많이 힘들어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시자마자 가방 속을 계속해서 뒤적이시는 것 아니겠어요?
아, 사랑의 매가 날아온다면 기꺼이 반기자!
진심을 다해 고개숙여 사죄를 드리는 그 순간!!!

할머님이 내미신 손에 들어있던 것은 알사탕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사탕과 캬라멜들이었습니다.
충분히 편하게 반말로도 하실 수 있는데, 존댓말을 써주시더라구요.
“아이고 고마워요 학생. 우리 손주놈 생각이 많이 나네~ 크게 될 거에요. 인상이 너무 좋으시네.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시겠어요.”
분에 겨운 칭찬 세례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전철을 내리는 그 순간까지 할머님은 저에게 좋은 말씀을 정말 많이 해주셨습니다.
할머님! 무려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머릿속에 기억이 정말 생생합니다!
많이 아프시고 창피하셨을텐데 저에게 좋은 말씀과 칭찬 많이 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p.s. 저 동기놈들은 전철 내리자마자 제가 아주 호되게 혼냈읍니다.
다 쓰고 보니 저 혼자만 재미있는, 기억에 짙게 남은 실수네요 ㅎㅎ
부족한 그림과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