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이라는 내 여자
오늘도 퇴근길에 루카스 카페에 들렀다. 이제는 거의 루틴 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답답한 사무실, 의미 없는 보고서, 공허한 인간관계. 그런 내 하루의 꽃은 그녀다.
그녀의 이름은 '수현'이다. 우연히 친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수현. 입안에서 몇 번이고 굴려본다. 맑고 청아한 이름이다. 그녀와 꼭 어울린다.
그녀는 언제나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한다. 가끔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 표정 하나하나가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다. 어떤 일을 하길래. 무슨 생각을 하길래. 오늘은 그녀가 라떼를 시켰다.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가 아니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걸까.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인스타그램에 '수현'을 치자 수천, 수만 명의 동명이인이 쏟아져 나왔다. 프라이버시 설정으로 굳게 닫힌 계정들 사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다. 며칠간의 헛수고 끝에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의 실마리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루카스 카페'였다. 요즘 웬만한 가게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가지고 홍보를 하지 않나. 역시나, 카페 이름을 검색하니 공식 계정이 바로 떴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내 가설이 맞다면, 그녀처럼 그곳을 좋아하는 단골이라면, 분명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게시물' 탭이 아닌 '태그된 게시물' 탭을 눌렀다. 그 카페를 방문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진에 카페를 태그한 기록들이었다.
스크롤을 내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커피잔, 디저트 사진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한 시간, 두 시간... 눈이 뻑뻑해지고 목이 뻣뻣해져 왔다.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수현이 친구들과 웃고 있는 사진, 주말에 다녀온 전시회, 좋아하는 음악 플레이리스트. 내가 모르는 그녀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밤새 그녀의 피드를 탐독했다. 마치 밀린 숙제를 하듯, 그녀의 과거를 하나하나 복습했다. 사진 속 그녀 옆에 서 있는 남자들이 거슬렸다. 특히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남자가 있다. 댓글을 보니 친한 친구 사이인 것 같지만, 그저 친구로 보이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기분. 질투라는 감정은 이렇게나 선명하구나.
그녀가 올린 사진 속 카페, 식당, 공원들을 지도에 즐겨찾기 해두었다. 그녀의 동선을 파악하니, 마치 그녀와 하루를 함께 보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건 그저 그녀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용기를 내야 겠다. 그녀가 자주 가던 서점 근처에서 '우연을 가장한' 마주침을 계획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영원히 투명인간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역시 그녀는 그 서점에 있었다. 인문학 코너에서 책을 고르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말 한마디 걸지 못했다. 그녀의 아우라에 압도당했다. 대신, 그녀가 만지작거리다 내려놓은 책을 기억해 두었다. 그녀가 떠나고 난 뒤, 나는 그 책을 샀다.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도 모르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위험한 짓이라는 걸 알지만,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녀는 익숙한 골목으로 접어들어 한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4층, 오른쪽에서 두 번째 집.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나는 그녀가 잠드는 곳을 안다. 그녀의 세상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기분이다. 이건 나만의 비밀이다. 그녀를 지켜주기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