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한 가정에 대한 푸념
세상은 넓고 사연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익명에 기대어 괜히 말해 봅니다
요즘 결혼상대의 조건으로 화목한 가정을 말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말을 들어보면 저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가정환경은 거의 필연적으로 유년기와 관련이 있잖아요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니 이해가 됩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 한켠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만 같아서요 물건이 깨지고 솥뚜껑 같은 손에 얻어 맞을까 벌벌 떨고 일방적인 고성이 가득하던 어린 시절은 이미 지나갔는데도 아직 그때 그 시간에 얽매여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별반 달라지지 않은 풍경 때문이겠죠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 가족은 함께 있을수록 고통만 늘어나는 것 같아요 초중학교 때에 아버지께 공부를 배운다고 매일같이 머리를 후려 맞아야 했고, 한창 코인이 유행하던 때에는 어머니가 잡코인에 당하셔서 모은 돈을 모두 날리시고, 아버지는 주식에 중독되셔서 회사도 그만두고 칩거하셨다가 지금은 일용직이라도 하십니다 대학 간 뒤 이제 좀 살만한가 싶었는데 부모님 결혼 초기에 어머니가 바람을 피우셨던 게 드러나는 바람에 아버지가 뒤집어지셨어요 아버지가 죽일까봐 어머니는 소식도 없이 도망가셨습니다 그 일로 외가와 연이 끊어지고 얼마 뒤 어머니가 돌아오셨습니다 겨우 모든 게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오빠가 보이스피싱에 당해서 억 단위를 날렸어요 자살하려던 걸 뜯어 말리고 온가족이 일해서 다 같이 갚아냈는데 이제는 아버지가 시도때도 없이 연을 끊으려 하십니다
원래부터 가부장적이고 화도 많으셨지만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네요 독립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제 짐을 거실에 꺼내둔 뒤 당장 다음날 아침까지 나가라든가, 독립하고나면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 나 죽어서 경찰 찾아오면 무연고자 처리하라고 해라 이런 말씀을 신경질적으로 하십니다 어떻게든 대화를 해보려고 하면 또 사람 이용해먹으려고 하냐고 어디에 비비려는 심보냐고 고함을 지르시고요 욕지거리는 기본입니다
맹세코 아버지를 이용한 적 없습니다 사춘기나 반항기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기술만 배웠던 분이라 얻어맞으며 배운 공부는 효과가 없었지만 용케 내신공부와 잘 맞아서 전교 1등을 줄줄이 하며 대학도 곧잘 갔습니다 가정형편이 썩 좋지도 않으니 사교육도 일절 안 받았습니다 대학 간 이후로는 알바비로 먹고 살았고 장학금으로 등록금 한번 내본 적 없었습니다 저희 오빠는 두말할 것도 없고요 평범한 인간이라 티 없이 착한 딸로 살았다고는 말 못하지만 그래도 썩어 문드러진 딸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가족을 지긋지긋하게 여기십니다 아버지와 생각이 다르면 그냥 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바람 건 이외에도 수없이 다투셨어서 거의 혐오하는 수준까지 가셨어요 저나 오빠와 갈등이 생기기만 하면 어머니 일을 사사건건 끌어다가 투영하며 화를 내십니다 마음 같아서는 진짜 정신과 치료를 권유하고 싶습니다 택도 없지만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공포에 짓눌려 살다가 상황이 이렇게 되니 차라리 정말 연을 끊는 게 낫겠다는 나쁜 마음도 듭니다 태어나고 싶었던 적도 없고 부모를 내 손으로 고르지도 못했는데 왜 이런 상황에 놓여야 하는지 한탄만 나오네요
제 성격은 밝습니다 세상엔 재밌는 게 많고, 침투부도 봐야 하고, 유튜브쟁이인데 요즘은 미라클방송해서 매일매일 맛난 반찬이 나오니 신나고, 친구들과 침소리하며 떠드는 것도 즐겁고, 나솔아저씨처럼 오빠랑 나솔 시청도 해야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는 것도 좋아하고 오히려 만사태평하게 사는 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행복하려고 해도 영원히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채로 살아야 한다는 게 아주 가끔씩 저를 슬프게 합니다
가족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다들 한번씩은 간다는 가족여행 한번 가본 적 없고, 흔한 가족 외식도 한 적 없고, 두런두런 다 함께 식사하지도 않고, 대화도 안 하고, 눈물과 공포로 얼룩진 형태로 남는다는 게 슬퍼요 이 집에서 배운 거라고는 소리 없이 우는 법, 화가 풀릴 때까지 싹싹 비는 법,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조용히 지내는 법, 눈치보는 법 같은 게 전부라는 것도요 이 넓은 세상에서 돌아갈 곳이 없는 기분입니다 뿌리가 뜯겨나간 것 같아요
앞으로도 가족이 절 지탱해줄 일은 없으니 스스로 눈물 닦고 스스로 토닥이며 살아야겠죠 누군가에게 거리낌없이 가정환경을 드러낼 기회도 없고… 경제적인 사유로 결혼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그건 사실 핑계고 그냥 저희 부모님 같은 사례가 될까봐 두려워서 결혼을 못하겠습니다 양가를 합쳐야 한다는 것도 너무 부끄럽고 무서워요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다는 꼬리표가 평생 저를 따라다닐 것만 같습니다
고작해야 이십년보다 조금 더 살았을 뿐이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이라는 걸 매순간 뼈저리게 느낍니다
어디에다가 털어놓지도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쓰니 조금이나마 나은 것 같네요 긴 글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감사드립니다 모두들 평안한 하루 되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