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부족도 죄가 되어버리는 이 세상이 가끔 밉다
능력 부족도 죄가 되어버리는 이 세상이 가끔 밉다.
능력에 대한 계약을 이행할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방이 계약에서 기대한 수치가 있기 때문에 과한 경우 계약 불이행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러한 것만 능력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능력’이라고 함은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다. 개인에 따라 최대 혹은 최고 역량에 차이가 있는 것. 얘를 들어 성적을 잘 받는 것은 능력이다. 같은 수업을 받고 서로 다른 성적을 낸다. 물론 능력 이외에 노력이라는 파라미터도 있다. 그러나 능력에 의해 그 사람의 노력 대비 결과의 효율이 달라진다. 즉, 단순한 노력으로 향상되지 않는 것이 능력이다. 능력은 들이는 노력과는 별개로 개발을 통해 향상시킬 수 있다.(여기서 개발에 드는 노력은 별개로 치겠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순히 결과만 보고 그 사람의 노력량을 잴 수 없다. 저시력자가 노력한다고 해서 고시력자의 시각적 인지를 따라갈 수는 없다.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인지하지 못하였다고 책망할 수 없는 것이다. 안경이 개발되고 나서야 저시력자와 고시력자의 노력 효율이 엇비슷해졌다. 하지만 절대 고시력자의 능력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안경의 기술적 한계와, 그 존재가 주는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세상이 능력의 영역이라고 잘 인지하고 있는 경우만 기술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어떨까? 우리가 소위 폐급이라고 부르는 신병, 약속 시간을 항상 못지키는 지각쟁이, 편식하는 아이들, 수업시간에 항상 졸고 있는 학생, 고·저체중자, 항상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친구 등등. 이들을 보고 우리는 “노력하지 않았다.”, “왜 더 잘하지 못하냐”, “일부러 그러는 거냐”와 같은 비난을 한다. 이것들에도 능력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인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수많은 능력 부족 사례에 대고 비난을 한다. 그리고 죄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노력의 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저 사람들보다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당신이 그들보다 더 노력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나?
폐급 신병이 눈치를 더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달랐던 것 뿐이다. 약속을 못지키는 이가 더 시계를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시간 계산에 미숙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시간을 뺏긴다. 편식하는 아이가 더 그것들을 먹으려고 노력할 수 있다.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이 더 선생님에게 집중하려고 할 수 있다. 고·저체중자가 더 식단에 신경을 쓸 수 있다.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친구가 대화와 소통에 진심으로 고민중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세상은 이들보다 자신이 더 노력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방패삼아 타인을 비난하고 공격한다. 그들은 명백히 능력의 영역이라고 인지할 때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키는 유전이고, 수저는 부모님의 차이고, 디지털 기기는 젊은 이들의 전유물이다. 이들에게 “당신의 키가 작은 이유는 우유를 많이 먹지 않아서입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지 않아서입니다. 왜 키를 키우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키가 작은 사람들이 싫습니다. 그들은 나태한 사람들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반발할 것이다. 자신이 똑같은 말을 타인에게 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쉽게 타인을 욕하는 이들도 그들의 능력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싫어하고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감정 표출을 자제하는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와닿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하소연을 보고, 누군가는 이 능력을 개발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됐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세상의 상처받는 사람이 줄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