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군의 근본이 된 황건적, 청주병

후한말, 장각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삼국지의 시작을 알린 황건적
각 군벌들의 초창기 렙업용이었던 황건적이 조조군의 근본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텐데 바로 오늘의 주인공, 청주병(淸州兵)이야기다.
때는 190년 동탁 토벌전의 대미를 장식하고자 홀로 동탁을 추격했던 조조는
그의 부하인 서영에게 궤멸당하고 군이 와해된다.

[ 191년 조조 상황 ]
하나 있던 군대마저 잃은 조조는 원소에게 의탁하게 되고
191년 원소가 기주를 강탈하고 기주목이 되면서
원소와 대립 중이던 연주 동군의 흑산적 토벌을 조조에게 맡기자
이에 부응해 주변 흑산적과 황건적 잔당을 토벌하고 동군태수에 임명된다.
하지만 고작 동군 하나 가지고 있던 조조에게 있던 병력규모는 수천정도로 예상된다.

[ 세상을 다시 황색으로! ]
그렇게 대망의 192년, 유행은 돌고 돈다고 했던가
황건적마저 유행이 돌아온다.
청주에서 거병을 한 황건적은 바로 옆 연주로 침공해 오는데
그 수가 약 100만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 고뇌가 느껴지는 연주자사 유대 ]
이때 연주자사였던 유대는 제북상 포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건적을 치러 나갔다 비명횡사하고 만다.
조조의 책사였던 진궁은 이를 놓치지 않고 유대의 신하들을 포섭해
조조를 유대의 후임자로 만들게 하였고
제북상 포신이 이를 적극 지지하자 조조가 황건적을 퇴치하려고 군을 일으킨다.

[ 조조군에 귀순하는 황건적 ]
첨예한 공방 속에서 기적같은 승리를 거둬가며 물량빨을 이겨내고
승리를 거둔 조조는 100만의 황건적 중 정예 30만을 뽑아 청주병이라 이름지었다.
부대 이름은 말 그대로 이들이 청주출신이라 청주병이 되었다.
(이 숫자에 대해 논란이 많은데 중국 단위는 대충 뒤에 0을 하나 빼면 된다.)

[ 폭풍성장 중인 조조 ]
어쨌든 우당탕탕 좌충우돌 황건적 퇴치를 마치고
그 과정에서 포신마저 죽어버리자 연주를 완전히 지배하게 된 조조는
청주병을 각지에 정착시키고, 농사도 짓고 전쟁도 하는 ‘병농일치’ 체제의
둔전병으로 썼고 그 자식들도 계속 청주병에서 군역을 하게 하는 '세병제'로 유지시켰다.
이렇게 청주병을 골수까지 빨아먹으며 세력을 확 키운 조조는
194년 여포와 복양전투부터 197년 장수와 완전투, 200년 원소와 관도대전, 205년 하북 평정때까지
최전선에서 청주병을 알차게 활용한다.
이 후에는 청주병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는데
조조 사후에 스스로 해산했다는 설도 있고
아무래도 부대 정체성이 좋은 뜻이 아니다보니
전국 단위로 군편제를 새로 하며 정규군에 편입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훗날 하북, 서량, 형주를 점령하며 군세를 불린 조조지만
그 밑바탕에는 바로 황건적 출신의 ‘건군 1세대 둔전병’
청주병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 주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