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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저의 삼국지 13 동백썰

침느님이병건
04.25
·
조회 239

삼국지 13은 기존 삼국지 시리즈와는 조금 다르게(장수제)

내가 직접 이야기 속 인물이 되서 플레이하는 스타일의 게임임

(침청자 주석:개방장의 삼국지 8 리메이크 비슷한거임)

 

이 게임은 자기 캐릭터를 만들어서 역사에 넣고, 플레이 할 수 있는데 너무 사기캐를 만들면 스토리가 너무 이고깽스러워지는 것도 있어서 나는 역사 이벤트(도원결의, 황건적 평정, 손견 암살, 삼고초려, 출사표 등)가 원래대로 흘러가는 삼국지 속의 소시민적 인물의 일생을 그리고 싶었음.

 

그래서 적당히 구린 캐릭터를 하나 만들어서 184년 황건적 토벌이 시작되는 해에, 동탁 휘하의 지방 도시의 관리로 시작했음.

 

막상 그렇게 시작하니까 스탯이 구리니 전투에는 안불려가고 맨날 도시에 남아서 시장 관리하라, 얘들 민심 챙겨줘라 잡무만 하루 종일 하길 몇 년 어느 날 보니까 갑자기 도시에

이렇게 생긴 동백이라는 여자애가 임관해 있더라 미디어로 삼국지를 알음알음 접해봤으니까 삼국지를 어느 정도는 아는데, 듣도 보도 못한 애라 그냥 일종의 씹덕 서비스 캐릭이라고 생각했다.

 

역사 이벤트에 관련도 없고, 일러스트는 예쁘니까 얘랑 결혼 한 번 해볼까? 생각이 들어서 작업을 꽤 쳤음.

(삼국지 13에는 서로 다른 성별의 무장에게 청혼하는 시스템이 있다.)

계속해서 대화 나누고, 예쁜 거 좋아한다길래 갖다주고 한 반년을 계속 대쉬해서 마침내 결혼까지 갔음.

 

금슬좋게 결혼하자마자 임신시키고, 지방이지만 일 열심히 한다고 공적이 쌓여서 시골 도시의 태수까지 됐음.

워낙 깡촌이라 이민족이나 도적이 갑자기 습격하지 않는 이상 싸울 일도 없고,

전투 능력치가 워낙 낮은 탓에 굳이 최전선까지 나를 징병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아 이번 생은 이래저래 평탄하게 굴러가겠구나 싶었음.

 

근데 여기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 행복하게 끝났더라면 썰 풀러 왔다고 하기에는 좀 모자르겠지?

 

코에이 역대 시나리오 - 연환계 : 네이버 블로그

삼국지13 에는 조건이 맞는다면 자동으로 발동하는 역사 이벤트가 존재하며 192년 3월 도내최고미녀 초선이 여포와 동탁을 이간질해서 동탁을 몰락시키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이 이벤트에서는 기존 동탁 세력 내의 동탁 일가가 다같이 처형되는데 동백 얘는 사실 동탁의 손녀딸이라 그대로 처형됨..

결국 나는 신혼에, 곧 출산을 앞둔 만삭의 아내를 저장하지 못했음..

 

세이브/로드가 가능한 게임이긴 하지만, 그렇게 플레이 하는건 나한테 의미가 없었고 나는 이번 생에 흥미가 확 식어버렸고 자살하기 위해 내가 태수로 있는 도시에서 이름뿐인 반란을 일으켜, 실패해 그대로 처형됨.

그게 193년 3월, 임신중이었던 아내가 죽은지 딱 1년이 되는 때였음.

 

새 게임을 시작할까 말까.. 고민하는 중에 공교롭게도 게임 시작하자마자 만든 세이브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시작되는 시대에 동탁 밑에서 말단 관리로 들어간 그 때의 세이브

 

그리고 나는 주저 없이 그 세이브를 불러 게임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동백을 살릴 방법을 고민하는 것.

 

고민 끝에 동백이랑 최소 짱친 이상의 관계를 만들고, 관계 시스템을 이용해서 동탁이랑 절교하게 만든다면 시스템 구조상 동탁이 몰락해도 동백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백은 191년 1월에 15살이 되어 게임 내 역사에 등장하고, 192년 3월에 이벤트로 처형당하니 1년 2개월 안에 친구 이상이 되고, 동탁이랑 손절하도록 유도해야 했다. 

이전 생의 내가 도왔는지, 똑같이 결혼은 물론 임신까지 시키고, 동탁과의 손절까지 성공했음.

 

동탁의 몰락이 가시화 된 192년 2월

나는 임신중이던 아내의 손을 잡고 동탁을 배신하며 중원 반대편의 도시로 피난했음.

이번 생에는 동탁 휘하에서 태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말단 관리로 일하면서 조금씩 쌓인 명성으로 지방 도시에 경력직으로 채용됐음.

나는 지난번 생처럼 전투랑은 관련없는 관리직의 삶을 살겠구나 싶었는데...

 

근데 193년이 되고 뭔가 이상함을 느낌.

동탁이 몰락하지 않고 오히려 천하의 절반을 먹음.

조조는 동탁을 타도하겠다고 나서다가 쇠락해서 원소에게 흡수당하기 일보 직전까지 몰림.

손책은 원소 땅을 먹겠다고 동탁과 손잡고 남은 천하의 절반을 먹는 중이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벤트 조건이 안맞아서 동탁이 몰락하는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게 되고, 그 세력이 분열하지 않고 그대로 남는 바람에 중원 최강의 세력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난세에 휘날리던 영웅들이 연합해도 연의 속 동탁을 물리치지 못했는데, 삼삼오오 분열된 간웅들이 게임 속 동탁을 물리칠 수 있을리는 만무했고 결국 동탁의 마수가 내가 사는 도시까지 도달하는데는 몇 년이 채 걸리지 않았음.

 

그 몇 년동안 점점 강성해지는 동탁의 세력을 막아보자고 사람도 구해보고 조언도 해보고 가끔 생기는 외교 특권도 써봤지만 내 낮은 능력치와 소시민적인 인맥은 무슨 일을 해내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랐음.

 

결국 동탁이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덮쳤을 때, 전사, 부상, 회유 등을 이유로 나 말고는 싸울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음.

 

도시의 태수는 나보고 도시 방어에 나가라고 명령함. 도시 방어에 나선 내 앞에 서 있는건 무력 수치 101짜리 마초였고 나는 일기토를 걸어온 마초에게 한 합만에 나가떨어져 사망함.

external/san.nob...

 

그렇게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메인 메뉴로 되돌아가는 것을 선택함.

 

메인 메뉴로 나와서 나는 고민해야 했음.

내가 동백을 동탁군과 손절시켰기 때문에 동탁이 죽는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내가 동백을 데리고 나오는건 천하를 동탁에게 넘기는것과 사실상 같은 행위가 아닐까?

소시민의 연애담 vs 역사의 원래 흐름,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되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듦.

 

하지만 플레이어인 나한테는, 이미 삼국지 속 "나"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184년의 말뚝에 자신의 개목줄을 걸어버린 어디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어버렸기에 한 번쯤은 둘의 순애보를 보고 싶어졌음.

 

처음은 어렵지만 두 번째는 쉽다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

포기하지 못한 나는 또 184년 황건적의 난이 시작되는 시대에 동탁 밑에서 말단 관리로 들어간 그 때로 되돌아감.

중간에 다른 도시로 전근 명령이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공적을 쌓기 위해 최대한 노력함.

 

191년에 동백이 등장하자마자 동탁한테 동백이 있는 도시로 근무지 이전 신청을 냈지만 반려됨.

바로 동탁군에서 하야하고 동백이 있는 도시로 달려가 구애를 시작함.

동백은 전 생을 기억을 못하니 백수찐따랑은 말도 섞지 않으려고 했고 이전 삶과는 다르게 친해지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음.

 

192년 1월, 원래라면 동탁이 몰락하기 한 달 전 동백과 짱친이 되긴 했지만 이번에는 부부의 연을 맺는것 까지는 실패함.

그래도 짱친이 되었기에 동탁군에서 동백을 빼내 올 수 있었고 이번에는 둘이서 조조한테 의탁했음.

 

지난번에 원소한테 조조가 발렸다면서 왜 원소가 아니라 조조한테 갔냐면 이번에는 또 알 수 없는 이유로 내가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이벤트가 발생하면서 조조의 세력이 적당히 커졌기 때문이었음.

역사가 또 이상하게 흘러간다면 조조 세력에 몸담아 있어야 어떻게든 수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근데 갑자기 초선의 계략으로 동탁이 여포의 애비초즌 인성질에 죽어버리고 동탁의 세력은 오체분시 당하면서 역사가 본래의 흐름대로 흘러감.

오히려 여기까지는 어쨌든 역사가 본래의 흐름을 찾았기에 개인적으로는 만족했음.

 

그 후에도 본래 역사대로 유비, 여포, 조조의 우당탕탕 할리갈리를 지나

200년, 조조와 원소의 관도대전이 발발하면서 시대의 빅매치가 강제로 시작하게 됨.

조조나 원소가 손가락 한개라도 더 빌려다 써야 하는 전세에 나랑 다르게 전투 능력치가 최악은 아니였던 동백은 조조군에 징집되어 전투에 나감.

 

관도전투는 개쩌는 빅매치임에도 불구하고 게임상 한 달 만에 끝나는데, 하필 그 짧은 기간 막바지에 적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그대로 처형되버림.

이번에는 다섯살 짜리 전쟁놀이를 좋아하는 딸내미 하나를 남기고..

 

플레이어 캐릭터의 가족이나 친구가 살해당하면 그 실행자를 원수(怨讐)로 선언하는게 있는데 나는 그대로 원소를 원수관계로 선언하고, 원소를 멸망시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함. 원래는 그럴 생각이 아니였는데, 이제는 역사적 흐름이고 뭐고 다 좆까고 원소놈을 죽이는게 제 1 목표가 됨.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가 되면 올려주는 스탯과 스킬 때문에 친구를 사귀었으며 능력치가 부족하면 능력을 올려주는 아이템을 구매하고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외교특권을 구매하고 원래는 맺을 리 없는 조조-유비-손권의 삼자동맹을 체결시킴.

이런 과정에 돈이 필요하면 공금을 횡령해서 자금을 마련했음.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소를 멸망시킨게 218년, 천하 지도를 다시 보니까

역사는 이미 어그러질대로 어그러져 이번에는 손권이 천하의 절반을 먹은 상태였음.

내가 명목상으로나마 주군으로 모신 조조는 내가 강행한 토벌전 때문에 곧 손권한테 먹힐 처치가 됐고 어미가 죽을 때 다섯 살배기였던 딸래미는 조조군에 사관했다가 손권군에 붙잡혀서 그대로 전향함.

 

조조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딸이 손권군에 있으니 면목이 없기도 하고 그래서 어지러진 내정만 정리해주고 조조군에서 하야하고 보니까 소지금이 딱 명마 한 마리 살 정도가 있더라 그 돈으로 딸 전쟁터에서 사로잡혀 죽지 말라고 명마 한 필 구해다가 주고 처음에 동백이랑 만났던 땅으로 다시 이사 가서 동네 사람들 도와주는걸 낙으로 살다가 동백도, 역사의 흐름도 무엇하나 지키지 못하고 노환으로 죽음.

 

메인 메뉴로 돌아와서 생각난 건 두 번째는 쉽지만 세 번째는 더 쉽다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 그렇기에 나는 지금 황건적의 난이 시작되는 시대, 동탁의 말단 관리로 돌아갈지 고민 중이다.

 

이번에는 동백이라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후일담

지나치기에는 지나치게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은 건 오일장의 열띤 땡볕 아래 조조와 손권의 일기토 이야기를 한창 팔다가, 근처 점포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나에게 화두를 던진 그 노인 역시도 옆자리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일어나기 직전으로,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연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별 것 아닌 길가의 소문을 부풀리는 호사가를 상대하고, 이야기를 팔아 오늘의 밀면값을 벌고자 하는 이야기꾼인 나에게 마왕의 손녀딸이라는 화두는, 흘려듣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소재였다.

게다가 노인의 하관에 적당히 길게 기른 수염과 깔끔한 의복은 그가 한때나마 관의 사람였던 것 처럼 보였기에 나는 그를 향해 의자를 반 쯤 돌려 앉으며 물었다.

 

"마왕이라 함은, 약 오십 년 전에 장안에서 죽은 그 주지육림의 동탁 말씀이시오?"

 

"그렇네."

 

"흐음..."

 

동탁의 손녀딸이라면 그의 말년에 양자로 들였던 여포, 그의 딸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거니 싶어-

 

"혹 양자로 들였던 여포의 딸을 말하는 것이라면,"

 

"확실히 여봉선에게는 딸이 있었지.

 하지만 그의 딸인 여령기를 말하는 것은 아닐세."

external/san.nob...

아는 체를 해 보았지만 노인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나는 아는 체를 하려다가 실패한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문득 노인이 그 여포의 호를 부른다는 사실에 표정이 굳었다.

 

아비가 셋이고 그 중 둘을 죽인 포악한 자. 그런 자에게 차리기에는 과한 예.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하다못해 그가 살아있다면 그를 두려워한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그는 이미 한참 전에 조조에게 처형당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호까지 붙여가며 예를 차리는 이 노인의 언행은 내가 반쯤 돌려앉았던 의자를 완전히 그를 향해 돌려 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은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사실 나도 마왕의 아들에 대해서는 본거나 들은 바가 없네. 단지 그의 딸인 동가 백이 위양군에 봉해지는걸 봤지. 그리고 그게 내가 말하는, 요즘 입에 오르내리는 마왕의 손녀딸일세."

 

"열 넷의 나이로 위양군에 봉해져 승상의 손녀딸로 호사를 누리다가 열 다섯이 되어 계례를 올리자마자 한 젊은 말단 관리와 눈이 맞았지. 그 세세한 과정이야 나로서는 알 수가 없으나, 결국 몰래 혼례까지 올렸다네. 계례를 올린지 채 일년이 되지 않고 일어난 일이니, 남자가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정확하게 그녀의 마음을 잡은 모양이야."

 

"그렇게 혼례를 마친 한 쌍은 그대로 야반도주를 했네. 왜 그랬는지는 정말 아무도 모를거야. 다만 그 소식이 동탁이 있는 장안까지 도달했을 때는, 이미 마왕의 수급이 여봉선의 창에 떨어진 뒤 였네."

 

"장안에서 그 난리가 나고 동씨 집안의 모두가 왕윤에게 처형당하는 와중에, 야반도주한 덕분에 그 손녀딸은 목숨을 건진 거지.

 둘에게 천운이 따른걸세."

 

"마왕의 무고를 부르짖는 부하들도 사실은 그 권력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직전에 야반도주해 행방이 묘연해진 손녀딸은 그대로 잊혀졌네. 권력을 쥔 마왕이 죽고, 그 권속은 뿔뿔이 흩어져, 남은 것이라고는 동씨 성뿐인 그 손녀딸을 그 누가 찾으려 했겠는가?"

 

노인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이 청산유수로 말을 내뱉었다.

 

"사실 마왕에게 손녀딸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장안에 있었다면 누구나 아는 내용이네. 하지만 뒤로 갈 수록 근래 들어 호사가들이 덧붙인 이야기들이 많지.

 무려 그 대상이 반백년 전 몰락한 마왕의, 야반도주한 손녀이니 말일세."

 

"사실은 손녀는 이미 장안에서 죽었는데, 그 남편이 그 복수를 하겠다며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라던가."

 

"아니면 남자가 사실은 마왕이 몰락하기 전, 마왕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전장에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라던가."

 

"반대로 살아남아 조조에게 의탁한 후에, 관도에서 조조와 원소가 싸울 때 손녀딸이 출전했다가 사망하고 남편은 그대로 홀애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라던가."

 

"이런 이야기들은 비극적이여서 그런지 드문드문 알더군."

 

"하지만 그 어느것도 사실이 아닐세. 적어도 지금은,"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처럼. 말해선 안되는 것을 말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 태도가, 그가 하려는 이야기에 무게감을 더했다.

 

노인께서는 진실을 아는 것이냐고 물어보려던 내 입은, 그의 그런 태도에 감히 숨도 내뱉지 못했다.

 

그 때 장안의 난리통에서 살아남은 사람일까?

아니면 설마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자신이 멸망한 마왕의 손녀딸의 남편이라는 얘기를, 허풍으로라도 옆자리에 앉았을 뿐인 객에게 하진 않을 텐데

 

그렇게 말과 숨을 두어 번 고를 시간이 지나고, 적막 속에서 점원이 조심스레 찻잔 두 개를 내왔다.

 

늦은 점심시간에 손님이라고는 둘 뿐인 가게.

 주문하지 않은 찻잔은 점주의 이야기값일 것이고, 마시기 쉽게 시원하게 나온 찻물은 빨리 이야기를 듣고 싶은 점원의 작은 수작일 것이다.

 

노인은 찻잔을 보더니 입이 마른지 입을 우물거렸다. 노인의 말을 기다리는 나 역시도 입이 점점 마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나온 찻잔의 물을 마시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기만 했다. 목이 마른 티를 내면서도 찻잔의 물을 마시지 않는 이유는 물과 함께 하려는 이야기도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그런 적막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나 역시도 이 적막이 깨트리기 어려워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찻잔만을 바라만 보던 중

 

"손녀딸과 그 남자는 한중땅에 숨었다네.

ソウソウ

 조조에게 가느니, 이용당할 뿐일테고.

df49c0ba8ed90dd2...

 원소에게 가는건 목숨을 건 도박이지.

마등14

 마등군은 동탁이라면 치를 떠니 그쪽으로 갈 순 없었고,

external/san.nob...

 여인의 몸으로는 넓은 중원 땅을 건너기도 힘드니, 가까우면서도 평화로운 한중이 숨기 가장 좋은 곳이었네."

 

"그리고 남자는 한중에서 작은 관직을 얻었네. 야반도주를 하긴 했으나 성실한 일처리로 명성이 좀 있었고 태수인 장로 역시 온화한 성품이니 타지라곤 해도 작은 관직을 하나 얻기에는 충분했어."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는데 성공했음을 자축이라도 하듯, 노인은 마치 술의 첫 잔을 들이키듯이 찻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런 평화속에 무엇이 두려웠던 겐지..."

 

"남자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했네.

 동탁 잔당의 추격인지,

external/vignett...

 여봉선의 무력인지,

external/san.nob...

 왕윤의 망령인지...

 어쩌면 난세의 시국 그 자체를 두려워 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남자는 정체모를 무언가에게 시달리는 것처럼 살았네."

 

"남자는 온갖 일들을 대비했다네.

 난세에 필요하다는 이유에 마음에도 없는 벗을 만들고,

 정세에 끼어들기 위해 사람을 매수하고,

 그러기 위한 돈이 없다면 공금을 횡령했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장들을 찾아가 용인술, 병법, 병기들을 공부했지"

 

"근방의 앵간한 명마, 명검, 명서들은 전부 그의 것이었네. 무재(無才)의 범인(凡人)이 난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했지."

 

"처음 이 한중 땅에 들어올 때 까지만 해도, 그저 성실하다고 알려졌을 뿐인 사관 하나가 스무 해가 걸려 근방에서 손에 꼽히는 장군이 되었으니, 정말 악착같이 살았다고 해도 되겠지."

 

무장이라는게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그 정도 되는 명사의 아내가 사실은 동탁의 손녀딸이라니, 적어도 이번 달은 면국 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속으로 주판을 굴렸다.

 

"그래도 아내에게는 헌신적이었네. 집을 자주 비우고는 했지만 돌아갈 때는 아내에게 사줄 패물이나 미주를 사갖고 돌아갔거든. 금슬이 좋아 슬하에 딸도 둘 있었네. 한중 최고의 미인들이였지."

 

"그런 노력이 다행히 무색하게도, 한중 땅은 꽤 오래동안 평화로웠네. 사변이 있고 이십년 넘게 가까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다투느라 바빴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조조와 손권이 싸우느라 이 한중 땅에는 관심이 없지."

 

"어쨌든 넘어온지 이십 년이 되던 해에, 그의 아내가 급사했다네. 서른... 서른 여섯이였을걸세.

 변고 같은게 아니라, 그냥 천수가 짧았던 게지."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이야기의 결말은 앞서 속으로는 주판을 튕기던, 이야기를 팔아 몇 푼 더 챙기려던 재담꾼을 퇴장시키에 충분했다. 재담꾼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대신 안타까움에 탄성을 내뱉는 관객만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형장의 핏빛 이슬로 사라진 것도,  전장의 이름모를 흙으로 바스라진 것도 아니네. 가족들이 모인 처소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지."

 

오랜 이야기에 숨이 겨운지, 노인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러자 처음부터 노인을 제외하고도 숨이 세 개이던 점포 안에서, 노인의 이야기가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나머지 세 개의 숨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아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한중 태수 밑에서 일했네. 장성한 딸 둘이 사관한 것이 마음에 걸린게지."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중원에 다른 호족이 모두 패망하여 조조와 손권만이 남았을 때, 남자는 태수에게 하야하기를 청했네. 조조와 손권이 서로 전력을 다해 싸우는 이상, 한중과 그의 두 딸에게는 별고가 없으리라 생각했지."

 

"남자는 그의 보물을 전부 두 딸에게 물려주고, 그대로 고향으로 귀향했네. 아내와 처음 만난 곳이라며, 거기서 여생을 보내길 원하더군."

 

그는 이제는 진짜 끝이라는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일세."

 

노인은 숨도 고르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점포 밖으로 향했다. 아직 하늘에 높게 걸린 햇살이 문을 나서는 노인의 그림자를 점포 안으로 그려냈다. 나는 몰려드는 생각에 멍하니 앉아있다 허둥지둥 그림자를 따라나섰다.

 

오일장의 마지막 오후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 인파 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노인의 발걸음을 따라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연유가 무엇이오?"

 

급한 마음에 노인을 엉거주춤 따라가며 던진 내 질문은 앞뒤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원래 무엇을 물어보려고 했는지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서스럼없이, 내가 노인을 따라나올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요즘 드문드문이긴 해도 동가 백의 끝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더군. 그러니 그 끝에 대해서 알리고 싶었네."

 

그러니까 즉, 이 노인은 내가 재담꾼인 것을 알고 일부러 나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일개 재담꾼 따위는 퇴장시켜버릴 것도 모른 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노인은 계속 걸어나갔다. 나는 처음부터 궁금했던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아니 역시"

 

"동탁의 말단 관리, 이유모를 야반도주자,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반란군, 전장에서 살해당한 백면서생, 이용당하고 버려진 홀아비. 무엇으로 남겨도 좋네. 그것들은 다 내 이름이니까."

 

노인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오일장 마지막 날의 인파는, 분명 첫날에 비할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노인을 나는 감히 따라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세 번째에는, 지켜냈다네"

 

이해할 수 없는 한 많은 목소리가, 내가 아는 노인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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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 국의 매독을 부르는 말.jpg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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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코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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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 삼국지용어 설명회 > "승상은 유부녀를 좋아해."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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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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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충격적인 대한민국 이름 등록 현황의 진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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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코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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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현재글 어느 유저의 삼국지 13 동백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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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느님이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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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알파고(그 사람 아님) 근황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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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끼얏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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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조선시대 휴대용 시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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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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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그들은 존재할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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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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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현재 전쟁발발 징후가 보인다는 인도, 파키스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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옾월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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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의외의 조선시대 합격취소사유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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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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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오나라의 다크나이트 토벌대장 하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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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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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프란치스코 교황 유언장 공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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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취한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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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2
일본군들을 신나게 팼던 한반도의 그것이 훨씬 더 강한 적군에겐 통하지 않은 이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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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무자검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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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1
< 삼국지용어 설명회 > 금범적과 담소자약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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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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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1
한국 전통식 데스크 셋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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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일본의 100만원짜리 전기밥솥 기술력 레전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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