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글쓰는인물] 꽃다운 나이에 고문받고도 대한민국을 지킨 독립운동가
오늘이야기는 내용은 작지만 부모와 오빠를 잃은 슬픔을 차룬 유관순 열사에대해 이야기해보려고합니다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에서 유중권과 이소제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 1916년, 미국 여성 감리 교회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습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도 자연히 가족과 헤어져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재학 중에는 교내 학생 자치 단체 이문회 에서 활동하며 하란사 선생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기어이 전원이 참가했습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일제는 전국 모든 학교들에 강제로 휴교령을 내렸고,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 천안으로 귀향해 만세 운동에 참여했는데,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만세 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모두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였고, 이 과정에서 유관순도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유치장에 갇힌 후 열흘 만에 공주지방법원으로 이송됩니다. 그리고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일본인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습니다. 이에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이라는 중형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 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일제 항거를 한 지 1920년, 3.1절 1주년 기념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불러 일제의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거했습니다. 이후 1920년 4월, 동경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은 결국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후유증 끝에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하였습니다.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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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글이 저에게도 도움이되고 부족한다는것도 잘압니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이 아픈 가슴을 제가 대신할수는없습니다 독립운동가분들에게는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사실 유관순 열사 독립운동가도 대단하고 존경합니다 또 우리가 잘알지못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이있습니다
우리도 유관순열사처럼 대한민국을 지키는 사람이 될수는없겠지만 잠제되있는 능력이 우리에게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