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메이저리그의 최고 타자, 조쉬 깁슨
니그로리그의 기록이 메이저리그에 정식 통합되면서, 메이저리그 역대 통산 타율, 장타율, ops 선두가 조쉬 깁슨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각 부문 역대 단일 시즌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종전 테드 윌리엄스 이후 마지막 4할 타자가 되었습니다.
조쉬 깁슨은 니그로리그 최고의 공수겸장 포수였습니다. 니그로리그는 당시 유료관중을 받을 수 있던 일요일 경기만 기록을 집계했는데, 그에 따라 그의 통산 홈런 갯수는 115개(무조건 더블헤더였음)입니다. 그의 정확한 홈런 갯수는 아무도 모르지만,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서는 그의 홈런 갯수는 Almost 800 이라는, 애매한 문구를 적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니그로리그는 팀간 편차가 매우 커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좌-중-우 순으로 110-132-91, 124-128-98 이라는 우타자에게 명백히 불리한 구장에서 뛰었음에도 이런 기록을 세운 만큼 높은 평가를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홈에서 중앙펜스까지의 길이가 147m인 구장에서도 장외홈런을 쳤을 만큼, 그의 장타력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월터 존슨은 조쉬 깁슨을 “흔들 의자에 앉아서도 내 공을 받아내고, 앉은 상태에서도 공을 1마일 밖으로 던질 수 있는 포수”라고 평했습니다. 단순 타격 능력뿐만 아니라, 수비 능력 또한 출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고로 월터 존슨은 메이저리그 통산 802경기 417승 279패 5914와 ⅓이닝, 2.17의 방어율, war 116.4를 기록한 최고의 투수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참가하지 못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가 흑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였던 케네소 랜디스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이런 고집으로 인해 그는 메이저리그 진출에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1943년 뇌종양 판정을 받았고, 수술을 하면 살 수 있었으나 야구를 영영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는 메이저리그 진출이라는 꿈을 위해 수술을 포기했고, 1946년까지 선수생활을 지속했으나 한해 평균 200경기를 소화했던 그의 무릎은 망가져버렸고, 그의 선수 생명 또한 끝나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1947년 1월 20일 향년 35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 3개월 후, 후임 커미셔너인 해피 챈들러 덕에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되는 데 성공합니다. 이듬해 깁슨이 동생처럼 생각해 가르쳤던 로이 캄파넬라가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포수로 데뷔하였습니다. 조쉬 깁슨의 꿈이 이뤄지고, 그의 기록이 인정받아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