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임이 공민왕 죽여도 재미는 있었잖아!'
최근 고려거란전쟁 드라마에 실망을 금치 못하는 분들이 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뭐가 문제가 되어 드라마가 망가졌는지 설왕설래도 많은데,
고거전의 실제 문제는 역사왜곡이 아니라 그냥 글을 못 쓰고 각본이 부실해서라는 근거로 <정도전>을 끌어오는 경우가 있더군요.
정도전에도 역사적 사실과 다른 장면이 많았지만, 배우들의 호연과 더불어 인물 구축이 훌륭하고 상황 설정이 그럴듯하며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시청자로 하여금 '정황상 이런 일도 있을 법하다’는 인상을 주는 데 성공했기에 문제삼을 일이 없었다는 논리입니다.

한 예로 정도전의 초반 숙적인 이인임은 박영규 배우의 중후한 연기와 감각적인 대사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심지어 이인임은 극중에서 공민왕의 암살 배후에 선 난신적자로 묘사되는데요.
이는 가히 종래의 대중적 인식과는 완전히 다른 파격적인 각색이지만 그조차도 가능했을 법한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조성했다는 점에서 <정도전>의 성취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 반대 사례인 고거전을 비판하면서 ‘공민왕을 시해한 이인임’은 하나의 소재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주장을 접하고 저는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로, 의외로 ‘이인임이 공민왕 시해의 배후자다’라는 설정이 작가의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김유가〉 이자용(李子庸)·홍상재(洪尙載) 등과 명의 남경(南京)에 사신으로 갔다.황제가 김유 등이 늦게 온 것을 책망하고 또한 말하기를, “지난번에 그대의 나라에서 짐의 사신을 죽이고 또 그대의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그 권신이 누구인가?”라고 하고는 엄히 고문을 가하자 김유가 이인임(李仁任)이라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김유를 안으로 불러 타이르며 말하기를, “그대의 전 국왕에게 아들이 없다는 것은 짐이 〈이미〉 아는 바인데, 지금의 왕은 누구의 아들인가?”라고 하니 김유가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고려의 환자(宦者) 최안(崔安)이 흥성사(興聖寺)에 이르러 김유의 종자(從者) 단득춘(段得春)을 속이며 말하기를, “너희의 왕이 출생한 바는 김유가 어제 이미 아뢰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숨기는가?”라고 하니, 단득춘이 말하기를, “김유의 말은 거짓입니다.”라고 하였다. 단득춘이 물러나 종산(鍾山)의 영국사(寧國寺)에 이르러 역관(譯官) 정연(鄭連)에게 말하였는데 이인임의 가노(家奴)가 가던 중에 이를 들었다.
〈그러자〉 황제가 김유 등을 대리(大理)에 유배 보내었는데, 천축(天竺)에서 2,000여리 떨어진 곳이었다. 다음 해에 풀어주었으며, 또 조빙(朝聘)할 것을 허락하였다. 김유 등이 돌아오니 우왕이 술을 하사하고 노고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경들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먼 곳에 유배되면서 산 넘고 물 건넌 것이 28,000여리이며 3년이 되어서야 살아서 돌아오니 내가 심히 민망하다.”라고 하면서 각각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이인임의 가노가 단득춘에게서 들은 말을 이인임에게 고하였다.이인임이 우왕에게 아뢰자, 찬성사(贊成事) 우현보(禹賢寶)와 밀직(密直) 강회백(姜淮伯)에게 〈김유를〉 국문하게 하였다. 김유를 청주(淸州)에 유배하고 이어서 한양(漢陽)에 유배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이, “김유가 돌아와 좋은 비단과 실을 많이 가져왔으나 이인임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죄를 얻게 되었다. 홍상재는 바다에서 왜구를 만나 호주머니가 모두 비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여겼다. 이윽고 김유에게 종편(從便)이 허락되었다.
우왕 12년(1386)에 김유를 다시 하옥하였으며 순천부(順天府)에 장을 쳐서 유배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이인임이 압송하는 아전에게 5일을 기한으로 다녀오라고 분부하는 바람에 김유는 마침내 경천역(敬天驛)에서 죽고 말았다.
- 고려사 김유열전. 일부 생략.
고려사 김유전에 따르면,
이인임의 정적이었던 무신 김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김유는 흥왕사의 난 진압 후 일등공신에 책봉되는 등 나름 입지가 있는 인물이었고, 공민왕을 충실히 따르던 인물로 생각됩니다.
명 태조 주원장을 만나러 명에 사신으로 갔습니다. 주원장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지요.
주원장은 여말선초기 고려의 정세를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발 빠르게 얻은 정보를 외교적 압박에 사용할 만큼 능수능란한 강골이었습니다.
이때 주원장은 명 사신 살해 사건(1374)을 비롯해 고려와의 긴장을 유발한 사태를 찝어 공격해 옵니다.
누가 공민왕 시해를 획책하였냐는 질문에 ‘고문을 이기지 못한(웃음)’ 김유는 냅다 이인임의 이름을 불러 버리고, 그 결말이 이인임의 보복이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민왕 시해를 둘러싼 정황은 얼마든지 수상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암살 당사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진상조사를 주도하며 집권하게 된 이인임, 잡음이 끊이지 않은 후계자 선정, 북원과 명을 둘러싼 줄타기 외교전 등등.
거기에 아예 명나라 태조한테 ‘이인임이 왕을 죽였다’고 불어버리는 다른 신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자극적인 스토리가 정설이 되는 것일까요?
물론 제가 보기에 이인임이 공민왕을 죽인 당사자라는 것은 이런 사료들만으로는 완전한 입증이 불가능합니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이 그러하듯이요.
김유의 발언은 그 자체로는 사실관계가 입증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의심스러우며, 미궁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결정적인 단서가 전혀 아닙니다. 그런 건 탐정소설에서는 흔하겠지만 역사의 행간은 쉽사리 한 길로 좁혀지지 않지요.
그러나 드라마 소재로 쓸 만큼 개연적이고 재미있는 추론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같은 점을 보고 처음 주제로 돌아가 봅시다.
사극과 역사, 창작과 왜곡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정도전> 속 이인임의 행보는 신박한 역사적 해석이 신들린 필력과 조응할 때 나타나는 좋은 결과물로 꼽을 만합니다. 드라마에 몰입하다 보면 정말 이인임이 공민왕을 시해했다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죠. (고거전의 인물들이 여기서 실패했다는 것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파격적인 역사적 해석이란 게 꼭 근거 없이 주장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료의 틈바구니에서 찾아낸 찌라시 같은 기사 한 줄, 곧 ‘이인임이 범인이다!’ 라는 김유의 외침이 각본에 얼마나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실제 사료의 성실한 탐색만으로도, 그리고 그렇게 도달한 ‘어, 이거 좀 그림이 그려지는데?’ 하고 발동이 걸린 사극 작가의 발상력만으로 아주 매혹적인 전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우 꽤 흥미롭습니다. 순수한 창작 못지않죠. 디스크 조각모음만으로도 제법 모범적인 사례, ‘공민왕 시해자 이인임’이 등장할 수 있듯이요.
어쩌면 사극의 영역에서 술이부작이란 오히려 그럭저럭 현실적인 목표일지도요?
이처럼 누추한 잡설이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분인 <고려거란전쟁>의 메인 작가님께 이 글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