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뒤흔든 괴승, 라스푸틴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러시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터 학교는 다녔지만, 학업에서는 불량해 문맹이었다.
그의 부모는 여러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살아남은 건 라스푸틴 한 명 뿐이었다고 한다.
그 후, 라스푸틴도 결혼을 하고 7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살아남건 셋 뿐이었다.
그렇게 가정을 이룬 라스푸틴은 수도승을 자처하며 그리스, 이스라엘, 튀르키예 등 여러 지역을 떠돌았다. 그러면서 영적 스승을 만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다만 정식으로 신학을 배운 적이 있는 지는 불분명하다.)
라스푸틴의 이름이 알려진 건 1900년대 초 부터였다. 그는 여러 사이비종교적 활동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귀족들에게 큰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1905년 11월 라스푸틴은 처음으로 차르 부부(러사아의 황제 부부)와 접견했는데 황후에게 ‘신의 사람’ 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큰 호감을 샀다.
당시 러시아의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는 알렉산드라 황후와의 사이에서 1남 4녀를 보았는데, 막내인 알렉세이 황태자가 혈우병 환자로 태어난 탓에 온 황실이 근심하던 차였다.
하나밖에 없는 황태자가 불치병에 걸린 끔찍한 현실에서 차르 부부는 여러 의사들을 황태자에게 붙여봤으나 차도는 없었고,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라스푸틴에게 치료를 맡겼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
그가 사용한 치료요법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치료를 받은 후 황태자는 멀끔하게 낫게 된다. 물리적인 치료보다는 알렉세이에게 마음의 안정을 취하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총애를 받아 종교와 외교, 심지어는 내정까지도 간섭하면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로 떠올랐다
매점매석은 물론 자기 마음대로 수상과 장관을 임명하고 파면하는 권력을 행사했는데, 이는 능력에는 관계없이 라스푸틴에게 아첨하는 정도에 좌우되었다
물론 라스푸틴의 국정 농단 시기에도 표트르 스톨리핀 같은 명재상이 있긴 했지만 좌익 혁명가에게 암살당했다. 그 후임으로 블라디미르 코콥초프가 재상이 되었고 코콥초프는 라스푸틴을 축출할 것을 황제에게 건의했지만 오히려 본인이 정계 은퇴를 해야 했다
니콜라이 2세는 정치가 적성에 맞지 않는 인물이라 러시아 제국의 차르로 즉위했을 당시 자신의 매제에게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라고 스스로 밝힐 정도로 황제로서 무능한 인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 나라를 다스려주겠다는 라스푸틴이 나타나고, 특히 사랑하는 아내 알렉산드라가 황태자를 구해준 라스푸틴을 감싸고 도니 마음 약한 니콜라이는 그를 두둔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알렉산드라 황후 역시 남편과 마찬가지로 내성적이고 신비주의 면모가 있어서 황후가 사교계의 중심으로서 차르를 도와 귀족들을 이끌며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러시아 황실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고립된 생활을 하는 일이 빈번했기에 황제를 보필해야하는 황후로서 완전히 실격인 사람이었다
이런 무능한 차르 부부를 등에 업고 라스푸틴은 차르 부부 앞에서는 성자인 척 하면서 뒤로는 세력을 점점 키워나가다 못해 황실 내 귀부인들에게 성추행도 서슴치 않는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을 해왔고 차르 부부도 이를 막긴 커녕 오히려 그를 두둔했다
실제로 공주들의 가정교사가 라스푸틴에게 성추행을 당한 걸 고발하자 그녀는 "라스푸틴이 하는 일은 모두 성스러운 것"이라며 오히려 가정교사를 해고하는 작태를 보였다. 일개 평민 사이비 주교에게 추행당한 일을 황실이 엄벌해도 모자랄 판에 두둔한 것이다
당연히 라스푸틴은 황족들과 귀족들에게 공분을 샀으며 당장 황태후, 황제의 여동생, 황후의 둘째 언니도 "라스푸틴을 멀리하라."라고 충고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 황후는 이런 인척들의 간언을 들은 척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황실 일원들과 러시아 사교계는 알렉산드라 황후를 그리 좋은 눈으로 보지 않았었기에 황제 부부의 대외적 인간관계는 최악이었다. 결국 라스푸틴 일로 인해 황후의 이미지는 걷잡을 없을 정도로 추락했고 아예 독일 스파이라는 시선까지 받게 되었다
당시 4명의 황녀들이 혈우병 환자들이라는 기록은 없었고 황녀 모두가 처형되어 자손을 남기지 못했지만 아나스타시야 황녀는 발가락 염증과 기관지염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거기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당시로서 드문 연애결혼 끝에 화목한 가정을 꾸렸지만,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사교계에서 겉돌고 있었고 겨우 얻은 아들이 혈우병이란 사실에 자신 때문이란 죄책감으로 우울증 증상까지 보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황태자뿐만 아니라 황녀들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을텐데 아마 이런 마음을 파고들어 라스푸틴이 공주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스푸틴이 지나칠 정도로 국정에 간섭하긴 했지만, 결과만이라도 좋았더라면 요승이라느니 미친 수도자라느니 하는 말을 듣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라스푸틴의 간섭은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으로 러시아의 국내외 사정이 안 좋아지자 니콜라이 2세와 라스푸틴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나마 좋게 봐줄 만한 건 대부분의 일에서 전쟁반대를 주장하며 러시아 제국을 평화상태로 유지하는데 기여했다는 것 정도. 애초에 라스푸틴은 제1차 대전에 러시아가 끼어드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사실 이건 라스푸틴의 상황도 근거가 될 수 있다. 라스푸틴이 실세가 된 건 알렉산드라 황후의 뒷배가 작용했는데 알렉산드라 황후는 독일계고 전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하는 거니 전쟁이 일어나면 황후에 대한 인심도 안 좋아지고 그건 자기에게 좋을리가 없다
1916년 12월 20일, 펠릭스 유수포프를 중심으로 한 반 라스푸틴 황족 · 귀족들이 라스푸틴 몰래 궐석재판을 실시하고, 일방적인 재판 진행 끝에 사형을 선고했다.
황족들 중에서도 라스푸틴을 죽이고 싶어 안달난 이들은 많았으나, 하필 펠릭스 공작이 앞장서 라스푸틴 암살에 나선 이유를 두고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라스푸틴이 공작의 얼굴을 보고는
“당신은 게이 아닌가. 나는 게이가 싫다!”
하고 말해 그때부터 원한을 품었다는 설.
펳릭스 공작은 부모가 딸을 기대했기 때문에 어릴 적 여장을 하고 자랐던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인지 여장을 하는 취미가 있었다. 이후 아버지에게 크게 깨진 이후 그만뒀는데, 라스푸틴의 게이 주장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무엇보다 라스푸틴은 정교회 수도자였고 기독교에서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는만큼 라스푸틴 역시 이런 부분때문에 정말로 펠릭스 공작을 경멸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하나는 펠릭 공작의 아내 이리나 공주의 미모에 흑심을 품은 라스푸틴이 찝적대자 공작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 그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설이다. 어떤 남자가 자신의 아내한테 추근대는데 분노를 안 하겠는가.
라스푸틴은 1916년 12월 30일에 펠릭스와 반 라스푸틴 황족들의 계략에 속아 잔치에 초대되어, 치사량만큼의 청산가리가 든 케이크와 와인을 먹었다. 그런데 청산가리가 든 음식을 먹고 죽었어야 할 인간이 2시간이 지나도 죽기는커녕, 노래를 부르고 파티를 즐겼다.
청산가리는 섭취시 의식을 잃기까지 약 5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위험한 독극물이므로,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떤 이유에서든 독이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
놀란 암살자들은 속으로 공포에 떨었지만 너무 늦으면 시체를 몰래 처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결국 계획의 핵심인물인 펠릭스가 권총을 꺼내 라스푸틴을 쏘았다.
그 직후 암살자들은 즉시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외투를 두고 온 바람에 황급히 다시 돌아온 펠릭스가 보니 라스푸틴은 살아있었고 오히려 펠릭스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이후 다시 다른 황족들이 쏜 총에 맞았지만 라스푸틴은 여전히 죽지 않았고, 파티장 밖으로 도주하던 도중 곤봉과 쇠사슬 따위로 얻어맞은 다음 네바 강 부근으로 말에 묶인 채 질질 끌려갔지만 그때까지도 멀쩡히 살아있었고, 끝내 꽁꽁 얼어붙은 네바 강 아래로 던져졌다.
그리고 며칠 뒤 라스푸틴의 시체를 건져내 조사해 보니 치명상은 총상이었으나 사인은 익사였다.
나중에 경찰이 네바 강 얼음 밑을 조사해 보니 라스푸틴의 손톱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