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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알못과 함께 알아보는 제 1차 세계대전 3 발발과정

미르띤이마룡
23.11.01
·
조회 573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벌어진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초강경모드로 나설 것이라는 것이 국제외교가의 공통된 관측이었다. 자국의 황태자가 세르비아가 지원한 과격주의자 단체에게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오스트리아 제국은 對세르비아 최후통첩에 한 달 가까운 시간을 소모한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이중제국 내부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이 상당했다.

우선 오헝 제국의 외교를 담당하던 외무장관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백작은 이를 제국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서 보스니아에 눈독을 들이며 영향력을 펼치려고 하는 세르비아가 제국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 여겼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대장 또한 무력을 써서라도 세르비아를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동안 유화노선을 채택해 온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마저 사라졌으니, 회첸도르프의 전쟁 불가피론은 의회를 휘어잡았다. 

외무장관 베르히톨트, 회첸도르프 참모총장, 오스트리아 총리 카를 폰 슈튀르크 백작, 재무장관 레온 데 빌린스키(Chevalier Leon de Biliński), 전쟁장관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대장이 대표적인 예방전쟁을 주장한 인물들이었다.

사라예보에서 황태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보스니아 총독도 강경파에 합류했다.

이 6인의 전쟁론자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안그래도 빛이 바래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세르비아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르히톨트는 전쟁 불가피성을 인식하면서도 순서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일단 세르비아에 반오스트리아 조직을 해체하고 피격사건의 책임자를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선전포고는 그 다음이었다.

초기에는 각료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름에도 세르비아가 발뺌하자 헝가리의 총리 티서 이슈트반을 제외한 의회 모두가 찬성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자 슈튀르크 총리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얘기를 종합해 “수사 상황을 좀더 지켜보고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한편 가장 중요한 군 통수권자이자 제국의 수장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반대에 가까운 편이었다. 

티서와 같은 의견이라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슬라브인들을 전쟁에 동원해야 하고 그러려면 슬라브인들에게 많이 양보해야 하니 전쟁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당시 오-헝에는 헝가리인들에게 동등한 주권을 줬듯이 동등하지만 제한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던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완전히 동등한 주권을 줘서 제국의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삼중제국 안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황실의 후계자가 적국이 배후로 보이는 암살단에게 대낮에 저격을 당한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베르히톨트는 최후 통첩안을 작성하여 황제에게 전달하였지만 황제는 독일의 지지 없이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한편 베르히톨트가 가장 우려한 것은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이면 범슬라브주의를 주창하는 러시아가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인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겠지만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도와 가세한다면 전쟁이 국지전에서 그치지 않고 최악의 경우 장기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매우 높았으므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베르히톨트는 독일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헝가리의 외무 보좌관 알렉산더 폰 호요스 백작(Alexander Graf von Hoyos)을 베를린에 보냈다.

호요스는 베르히톨트가 작성하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서명한 서한을 들고 베를린에 도착했고, 베를린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는 7월 5일 포츠담 궁을 찾아 빌헬름 2세와 오찬을 하면서 국서를 전달하고 황제의 의중을 물어보았다.

빌헬름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계획에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면서 내각과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빌헬름 황제는 그날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독일 제국 총리와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참모총장 등을 불러 자신의 견해를 물어보았다.

 총리와 군부는 황제의 생각에 모두 동의했다. 베트만 총리는 황제의 대답을 ‘백지 수표(blank cheque)’나 다름 없다고 보았다. 즉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벌이면 독일은 무조건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전면적인 오스트리아 지원을 약속한 빌헬름 2세는 3주 일정으로 뱃놀이하러 갔다.

독일 내부적으로 열강들이 발칸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는데, 사라예보 사건의 여파가 아직 가시기 전이었고 삼국 협상의 일원인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마저 페르디난트 대공을 동정하고 세르비아가 명분을 제공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판단에는 "오헝 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걸어온다 하더라도 정당성이 명확하므로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빌헬름 황제의 낙관적인 판단이 바탕이 되었다.

 다만 독일의 지지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강경책을 쓰건 유화책을 쓰건 오스트리아가 확고한 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태의 직접 당사자는 오스트리아였으니 이 요구는 당연했다. 호요스는 이런 독일의 의사를 가지고 다음날인 7월 6일에 곧바로 빈으로 돌아왔다.

7월 7일, 오스트리아는 제국 내각을 소집했다. 정부 쪽에서는 독일에 갔다 온 호요스를 비롯해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외무성 장관과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전쟁성 장관, 레온 데 빌린스키 재무장관, 카를 폰 슈튀르크 오스트리아 총리와 티서 이슈트반 헝가리 총리가 참석했고, 군부 쪽 인사로는 육군을 대표하는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참모총장, 해군 대표로는 전쟁성 해군부장 안톤 하우스 대장을 대신해 카를 카일러 폰 칼텐펠스(Karl Kailer von Kaltenfels, 1862-1917) 해군소장이 소집되었다. 

.여기서 각료들의 출신별, 민족별로 다른 정치적 입장 때문에 조율에 또 10여 일을 보내 7월 19일에야 통첩문이 완성되었으며 실제로 세르비아 및 유럽 열강에 이 통첩이 통보된 것은 7월 23일이었다.

통첩문이 완성되고도 오스트리아가 통첩 발송을 지연시킨 건, 그 시점에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와 프랑스의 외무장관이 러시아 제국을 방문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러시아 영토에 있는 도중에 통첩을 발송한다면 러시아-프랑스 간의 공동대응이 논의될 시간과 여지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 군부에서 내각에 전쟁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고 보고하면서 전쟁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세르비아에 전달된 최후통첩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이 담겨진 내용이었다

 

반(反)오스트리아 교육의 금지, 사라예보 사건에 연루된 세르비아 관리들의 체포 및 심문, 오스트리아 관리가 직접 세르비아 영토에 들어가 수사에 참여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48시간 내에 통첩에 대한 답문을 요구했다.

 

이는 사실 오스트리아의 계략도 있었는데 오스트리아는 당시 세르비아 정부 수반들과 세르비아 주재 외교관들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정부가 대답하기 어렵고 다른 나라와 외교적 협의가 어려운 타이밍에 최후통첩을 들이밀어 세르비아가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 최후통첩이 세르비아에 도착했을 때 세르비아 수상 니콜라 파시치(Никола Пашић)는 지방 여행 중이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베오그라드로 복귀하긴 했지만 너무 늦어서 이미 최후통첩 48시간 중 24시간을 날려먹었다.

거기다 외교적 조언 역할을 해줄 강대국 외교관들도 우연의 일치로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러시아 공사는 사망, 프랑스 공사는 병환으로 각각 공석 중이었으며 아예 후임자가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는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가 러시아를 방문하는 중 이었기에 프랑스와 러시아의 대사 파견 일정이 지연됐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세르비아 공사는 이미 전쟁이 터지고 난 1914년 8월 26일에나 도착했다.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영국 공사마저도 병환으로 뭘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이 때문에 유럽 열강의 권고는 상당히 늦게 세르비아에 전달되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한결같이 세르비아의 책임을 추궁하며 오스트리아가 제시한 조건을 수용하라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영국이 세르비아를 압박한 이유는 자국도 군주제 국가이기 때문이다. 즉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면 자국 군주와 태자가 암살당할 때도 할 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프랑스도 정체는 공화정이었지만 이때는 제정이 폐지된지 44년밖에 안된 시점이었다

안 그래도 비관론이 지배적이던 세르비아 내각은 결국 영프의 권고를 받아들여 오스트리아의 통첩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그런데 통첩시한을 몇 시간 남기고, 러시아 주재 세르비아 공사로부터 "러시아가 우릴 지원한다!"는 희소식과 함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낭보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사실 오스트리아가 조금만 더 빨리 행동했어도 러시아가 이런 신속한 결단을 내리긴 어려웠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사라예보 사건 이후 약 1달여를 허비하는 동안 니콜라이 2세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중관료들은 독일의 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이참에 오스트리아를 조지자는 식으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이에 세르비아 내각은 일제히 궐기하여 대 오스트리아 강경론으로 전환했으나, 러시아가 지원한들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라는 제국을 상대로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최후통첩 중 오스트리아 관리의 자국 영토 진입을 거부하고 나머지를 수용하기로 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오스트리아에 통보했다

하지만 백지수표를 내준 독일을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의 제안을 무시하고 세르비아의 외교공문 접수를 거부하는 동시에 국교를 단절했다.

결국 1914년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자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독립을 보호할 것을 선언하고 7월 31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 빈,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왕립정부는 주 베오그라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를 통해 1914년[11] 7월 23일 귀국에 통보한 요구에 대해 귀국이 만족스러운 회답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정부와 왕국정부는 스스로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도록 강요받은 상태에 놓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국은 무기와 힘에 의지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는 세르비아 왕국 정부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통보한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통보한 선전포고문 전보. 세르비아에서 제출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러시아는 애초 부분 동원령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특히 총동원령을 내리면 독일을 자극할 것이 명백하다는 것은 러시아 역시 잘 인식하고 있었다. 

러시아 온건파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한 지역의 군관구에 한정하여 동원령을 내리는 것으로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 수뇌부들은 부분 동원령을 내리면 오스트리아가 총동원령을 내릴텐데 그러면 빠르게 군사적인 대응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참전할 경우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을 동시에 유지해야 하므로 병력면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으니 러시아가 부분 동원령을 내리더라도 오스트리아로서는 총동원령 수준으로 대응해야 했던 게 사실이었다.

거기다 이 시기에는 산업의 발전과 철도의 등장으로 총력전이 가능해지면서 전쟁은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달리기 경쟁으로 바뀌어갔고 적들이 유리한 곳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당시 유럽의 군 수뇌부 모두를 지배했다. 

결국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참모들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총동원령을 내렸다.

사실 이 과정도 복잡했다. 니콜라이 2세는 날밤을 꼬박 새며 고민했고,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베를린 사이에서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간의 수많은 전보들이 오고 갔다.

두 황제는 필사적으로 독일-러시아 전쟁을 막으려 애썼고, 특히 니콜라이 2세는 어떻게든 빌헬름 2세에게 이번 군사행동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가 대상이라고 항변했으며 빌헬름 2세는 그에 따른 진정성을 보여달라고 요구했고, 때문에 니콜라이 2세는 7월 31일 오전에 일시적으로 총동원령을 취소한다.

 

그러자 러시아 군 수뇌부가 궁전으로 달려와 총동원령을 내리지 않을 경우 독일의 기습에 일패도지한다며 총동원령 취소를 철회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몇 시간에 걸친 압박에 황제는 결국 다시 총동원령을 내렸다.

러시아의 총동원령에 위협을 느낀 독일 제국은 뱃놀이 갔던 카이저가 허겁지겁 베를린으로 돌아오고, 독일 제국은 수많은 격론을 벌인다.

사실 이때만 하더라도 독일 제국이 바로 전쟁을 시작 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했다.

 

당시 전 유럽은 사회주의에 기반한 노동계급 정당들이 득세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전쟁은 지배 엘리트층의 투쟁에 노동계급이 일방적으로 희생되는 것이란 시각을 견지하고 있어서 반전성향을 강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의 보수파가 러시아의 공포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서 추는 순식간에 기울어진다.

결국 강경파의 주장대로 이런 때를 대비해 만들었던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키고 8월 1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린다.

독일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수 있었던 건, 주 러시아 공사 및 독일 본국의 외무 관료들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보인 군사적 추태과 손실을 보고 러시아는 함부로 전쟁을 하지 못하며 설령 전쟁해도 혁명이 일어나서 망한다는 식으로 호언장담을 했고 이를 빌헬름 2세 및 독일 수뇌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편 빌헬름 2세는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승리가 불확실한 슐리펜 계획 대신 영국이 보증하는 프랑스의 중립 약속을 받아낼 수 있는 쪽을 선택하여, 몰트케에게 "당장 서부로 가는 병력 다 동부로 돌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러시아만 이기면 승리한다!" 라고 의기양양하게 외쳤으나 몰트케는 "폐하, 지금 병력동원 다 시작되고 철도 움직이는 중인데 여기서 병력 이동을 취소하고 동부로 옮기면 혼란에 빠져 재배치되다 자멸할 것입니다." 라면서 맞섰다.

빌헬름 2세는 그에게 "그대의 걸출한 삼촌이라면 나한테 다른 대답을 했을 것이다." 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대 프랑스 개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독일은 8월 1일에는 러시아에,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아직도 전쟁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자신의 몸을 집어넣어서라도 막아보려던 온건파들은 많았다. 당장 독일의 대 러시아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러 러시아 외상을 방문한 주러 독일공사는 선전포고문을 건네지도 않고 외무장관과 자신의 유대관계, 인간적 친분을 언급하며 사정하고, 또 사정하고, 고개를 조아리고 무릎을 끓으면서까지 총동원령을 취소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그럼에도 (총동원령을 취소할 권한이 없던) 외무장관이 그 요청을 거절하자 그제서야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며 '난 러시아가 너무 좋았다, 우리가 어찌하여 이런 관계가 되었느냐, 짐을 싸 귀국해야 하는데 도저히 짐을 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며 울먹였다.

프랑스에 대해서는 빌헬름 2세와 외교부처 모두 삼국 동맹-삼국 협상 간 대립이나 슐리펜 계획 때문이라도 선전포고는 피할 수 없다고 인식은 했지만, 적어도 마지막으로 협상은 해보자며 독일의 대 러시아 전쟁에 대해 프랑스가 중립을 지켜줄 수 있냐는 의사를, 그리고 영국에게도 독일-프랑스 사이를 중재해 줄 수 있냐는 의사를 타진했다.

프랑스에서도 사라예보 사건에는 세르비아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으며, 러시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를 지원한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와 동맹 관계라도 프랑스가 중립을 지키는 것은 매우 정당하고도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군부 및 강경파들의 경우 1870년의 원한으로 이 제의를 묵살하자고 했고, 온건파들은 러불동맹을 파기했다가 프랑스가 외교적 신의를 깨트리고 다시 과거처럼 고립될 수 있다는 생각에 협상 주장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프랑스가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러시아가 동원령을 선포하기 전, 프랑스에서도 전쟁을 할 의사가 없다는 표시로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병력들을 10km 이상 후퇴시켰다. 그러나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독일도 이에 맞대응하면서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결국 8월 4일에는 프랑스도 의회 만장일치로 독일과의 전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대로 벨기에를 침략하는데 사실 벨기에 침공 직전에도 빌헬름 2세는 다시 한 번 몰트케에게 "벨기에 공격하면 영국이 참전한다. 벨기에를 피해서 공격해라!" 라고 명령했으나 몰트케는 "안됩니다. 병력집결부터 기동, 전투까지 이미 계획이 짜여 있어서 벨기에를 넘어가지 않는다면 계획이 다 무너집니다." 라며 펄쩍 뛰어서 어쩔 수 없이 독일은 벨기에를 지나가게 된다.

당시 영국은 느닷없는 발칸의 분쟁이 전 유럽을 휩쓰는 대규모의 전쟁으로 커지려고 하자 기가 질려서 직접적 참전을 꺼리는 중이었으나 영국이 보증한 국제적인 벨기에 중립이 슐리펜 계획에 의한 독일의 침략으로 무시되면서 참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 결국 독일에 맞서 참전하게 된다.

사실 영국 정부도 벨기에 침공 직후 바로 선전포고한 것은 아니고, 약 하루의 최후통첩을 날리며 통첩시간 내에 벨기에에서 철군할 것을 독일에 요구했으나, 독일은 답을 주지 않았다. 이때 영국의 통첩기준시각은 자정이었는데, 독일측 시각으로 자정이 되었음에도 아직 런던 표준시로는 자정이 아니라며 억지로 1시간을 더 기다리기도 하고, 독일이 대영 선전포고를 했다는 오보에 낚여 준비된 선전포고문을 독일 공사관에 보냈다가 오보임이 확인되자 허겁지겁 회수하는 등 전쟁을 피하려고 정말 처절하게 노력했다.

또한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는 아닐 것 같던 일본 제국도 칭다오 무너트린 거만 빼면 별로 싸운 건 없지만 영일동맹과 영국의 지원요구에 근거해서 8월 28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다.

이로써 당시 주요 열강 국가 중 동떨어진 아메리카 대륙에서 혼자 놀고 있는 미국, 삼국 동맹을 깨고 중립을 선언해버린 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이탈리아, 오헝 제국과 함께 열강 중 말석을 차지하며 내부적 문제로 참전은 무리라고 평가받던 오스만 제국을 제외하고 모조리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고 이 세 나라도 결국 시간 차이를 두고 참전하게 되면서 결국 모든 열강 국가들이 얽힌채 치고 박고 싸우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사실 인척관계로 얽혀있던 각 참전국의 군주들은 내심 전쟁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높은 수준으로 산업화된 국가들은 이미 군주들이 일일이 통제하기는 어려운 수준으로 복잡해졌으며, 민족주의의 열풍은 군주들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

이미 군주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를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고, 오히려 군주들의 어설픈 조치 때문에 내부에서의 모순과 문제점은 더욱 커졌다. 여기에 국가 간의 소통창구가 딱히 없었던 것도 다소 어처구니 없는 에스컬레이션에 부채질을 했고, 전후에는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국제연맹, 국제연합 등의 기구가 설립되었다. 국제연합은 비록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국지적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번지는 것을 어느정도 막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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