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악의 전술, 카미카제

일본 해군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를 크게 약화시켰고, 이후 지속적인 공세를 유지하여 산호해 해전에서 미 해군을 상대로 전술적 승리를 거두면서 태평양에서 미 해군을 몰아내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고 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후 미 해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이 분투하여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4척 가운데 3척이 5분 만에 모두 격침됐다. 일본 해군이 자랑하던 기동부대 전력이자 진주만 공습의 주역이던 항공모함들이 한순간에 녹아버렸다. 그 이후 일본군은 공세 능력을 상실하여 점차 수세에 몰렸다.

거기에 더불어 미국이 진주만 공습 이후 빠르게 체계를 정비하고 기술 개발과 생산에 힘을 쏟자 격차는 점점 벌어져서 일본 해군이 도저히 미 해군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전력의 격차가 벌어졌다. 당연히 일본 해군이 미 해군을 공격하는 것도 점점 효력이 사라졌다.

군이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부르는 1944년 6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그나마 남은 베테랑 파일럿 한 줌과 함께 괴멸했건만, 미 해군은 고작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USS 사우스다코타(BB-57) 한 척이 소파되는 피해를 입음에 그쳤을 뿐이었다.
이렇게 일본 해군은 단순히 수세에 몰리는 정도가 아니라 통상적인 공격으로는 도저히 미 해군에게 의미 있는 타격을 줄 수가 없는 지경에 처해 결국 방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미 해군, 미 해군의 지원을 받는 미 해병대의 상륙을 막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압도적인 수세를 막을 길이 없자, 일본군 내 여기저기서 자살 공격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첫 카미카제 출격이 있기 이미 1년 전부터 해군 군령부에서 논의가 있었고 가이텐과 MXY-7 오카, 신요 보트와 같은 자폭 병기가 적어도 1944년 4월 이후부터 건조 방침을 구체화했다. 1944년 7월 21일, 일본 군령부는 '대해지 제431호'에 의거하여 특공작전을 정식으로 채용하였다. 같은 해 10월 5일 군령부는 지시하지는 않겠지만 현장의 자발적 공격은 반대하지 않겠다면서 자살 공격을 사실상 정식으로 허가했다.)

첫 정식 카미카제 공격은 일본 해군 중장 오니시 타키지로(大西瀧治郞)가 시행했다. 마리아나 제도를 상실한 후 오니시는 제5기지 항공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루손 섬에 도착하였으나, 자신이 운용할 수 있는 비행기가 100대도 채 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1944년 10월 19일 필리핀 방어전을 준비하고자 마발라캇 기지에서 자신이 지휘하는 제201해군항공전대의 인원들을 차출하여 이튿날 자살특공부대를 최초로 조직하였다. 이들은 A6M 제로센에 250Kg 폭탄을 적재한 채로 적함에 들이받도록 훈련받았다

같은달 25일 레이테 만 해전에서 최초로 카미카제를 시행하여 미 해군 77.4 임무전대 Taffy-3 소속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USS 세인트 로(CV-63)를 격침하고 USS 칼리넌 베이의 갑판 일부, 구축함 3척을 손상시켰다.

카미카제 공격이 당시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불침이나 다름없어 보이던 미 해군에 타격을 입힌 결과를 내자, 일본 대본영은 고무되어 이러한 방식으로 승기를 다시 되찾아올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품고 본격적으로 자살 공격 위주로 전략을 구상했다.

심지어 1945년 1월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특공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열도 방위계획 논의가 있었음이 밝혀지는 등, 카미카제가 본격적으로 명목상으론 '자원'이지만 국가가 강요한 정신나간 자폭 공격 계획으로서 시행되었다.
- 실패 원인

연합군(특히 미군) 방공능력이 비약하자 일본군이 미군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미 해군의 방공전술이 무르익어 대공원형진을 내놓아 시너지 효과까지 나왔다.

그 결과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한 척이 일본군 전투기 수십 대를 가볍게 학살해버리는 참극이 일어났고, 폭격이나 뇌격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군함에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 공격기들은 종이비행기마냥 떨어졌다.

1944년 말에는 일본군 함대가 괴멸되자 미 해군 항공모함의 함재기에서 공중 초계 및 호위 용도로 사용되는 전투기의 비율이 40%에서 70%로 늘어 미 해군의 주요함에 접근하기 전에 이미 미군 초계기에게 격추되기가 일상이었다.

거기다가 초기에는 그나마 숙련된 조종사들의 지원을 받아 구성한 자살 공격대가 카미카제 공격을 시행 하면서,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미 함대에 유효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그 결과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USS 세인트 로(CVE-63)가 격침당했고, 그 외 5척의 함선이 파손되었다

문제는 그 이후 자살 공격이 몇 번 반복되자 미 해군은 항공모함을 지키기 위해 대공원형진을 도입, 방공망을 더욱 촘촘하게 구성하고, 비행기를 확실하게 분해시킬 수 있는 5인치 대공포를 구축함과 전함에 증설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더 중요한 건 파일럿의 중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 과달카날 전역을 거치면서 조종요원 손실이 계속 늘어난 반면 조종사 양성 능력은 당시 다른 참전국들에 비해 상당히 낮았다.
일본군은 함대결전사상에 취해서 단기 결전만 염두에 둔 전략을 짜두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조종사를 어떻게 수급할 지는 깊이 있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조종사 양성기관 수도 적고 폐쇄적이었다.
그렇기에 필리핀 해 해전 이후로 일본군의 조종사들의 전력은 개전 초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화되었고 인력도 부족하여, 적 군함 공격은 고사하고 적 군함을 공격할 공격기들을 호위할 호위 편대를 짜기도 힘들었다.

결국 아래에서도 지적되듯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는 평균적으로 미 해군과의 교전에서 일본 해군이 120대의 항공기를 출격시키면 그 중 72기가 미 해군 항모비행단의 요격기에 의해 격추되고, 남은 48기 중에서도 16기는 방공망에 의해 격추되며, 그러고도 살아남은 전폭기나 뇌격기도 고작 유효 타격 네다섯 발을 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즉 고작 네다섯 번 공격을 하고자 73%에 달하는 기체가 격추되는 것이 1944년 말 일본 해군의 실태였다. 즉 일본 해군이 미 해군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조종사들 입장에서는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에 반하여 카미카제 공격을 시행한 초기에는 유효한 타격 네다섯 번을 내고자 평균적으로 35번 정도 공격을 시도해야 했다.
그러니까 미 해군에게 네다섯 번 피해를 입히고자 하면 통상적인 공격에선 조종사 88명이 포로로 잡히거나 사망하는 데 반해, 자살 공격에선 고작(?) 35명이 확실하게 사망할 뿐이었다.
즉 (공격을 계속한다는 조건에서) 이러한 자살행위가 오히려 전체적인 전력 보전에 유리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쯤 되면 정상적인 군대라면 더 이상 무의미한 교전을 지속하여 아군의 피해를 늘리기보다는 항복하거나 강화를 시도하겠지만, 일본군은 정상적인 군대가 아니었다. 자살 공격이 의외의 효과를 내자 오히려 그것에 고무되어 전쟁을 지속할 기회로 삼으려는 끔찍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군이 품은 부조리함이다. 그렇다고 일본군의 모든 사람이 미치진 않았다. 처음 작전 계획을 들은 해군 장관부터 어이가 없어서 "이딴 걸 작전이라고 내놨냐?" 하고 따졌고, 첫 카미카제 출격 때는 호위를 요청받은 부대의 지휘관도 "그딴 미친 짓에 붙일 호위 따윈 없음"이라며 대놓고 씹었다. 기어이 카미카제 전술이 정식으로 채택된 회의에서도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꽤 많은 지휘관들이 반대했으나 천황이 너무나 막장이었던지라 결국 통과되고 말았다.

더 기가 막힌 점은, 이딴 자폭 행위는 중세 무사도를 기준으로 보아도 가장 금기시하는 행동이었다. 할복이나 옥쇄는 어디까지나 명예를 택했다면 죽을 때 죽더라도 최후의 한 사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으라는 것이지 처음부터 목숨을 내다 버리며 자폭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자신들의 체통과 보신주의에 목말랐던 군부는 자폭 행위를 미화하면서 매우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하지만 전쟁 끝난 후 군부에서 고위직들 중 자결한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 어록
그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용기 있게, 기쁘게 떠났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다. 그들은 마치 도살장의 양들과 같았고,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 기간병들에게 실려서 강제로 비행기 안으로 밀어넣어졌다.
―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 중 요미우리 신문 전 회장 겸 주필 와타나베 츠네오의 증언
카미카제를 미화하려는 생각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그건 미친 짓이다. 카미카제로 허망하게 죽어간 친구들을 평생 애도하며 살았다. 그렇게 친구들이 죽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후회하고 고통받고 있다. '카미카제는 절대 미화해서는 안 되며 다시 일어나서도 안 된다.
― 생존 카미카제 대원 칸베 유타카의 증언
"이렇게까지 해서 내리막길인 전쟁을 벌일 필요가 있는가? 승산이 없는 상황에 자포자기한 상층부의 마지막 발악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 이와모토 테츠조가 44년에 제2 항공전대에서 카미카제 특공대원을 모집하자 했던 말
"카미카제는 일본 고래(古來)의 기습작전에 따른 것인데, 한 번은 성공하더라도 10개월 동안 몇 번씩 시도하면 어떤 바보가 당하겠습니까? 천황께서 그걸 깨닫고 멈추도록 지시했어야 했습니다."
― 사카이 사부로가 카미카제에 대해 한 말
"나 같은 우수한 파일럿을 죽이다니. 일본은 끝장이야. 난 굳이 몸으로 들이받지 않아도 놈들의 갑판에 폭탄을 명중시킬 수 있다고. 난 천황이라든가 일본 제국을 위해서 가는 게 아냐. 사랑하는 내 마누라를 지키기 위해서 가는 거지. 전쟁에서 지면 미국 놈들에게 내 마누라가 강간당할 거 아닌가? 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으러 간다. 어때, 멋지지 않나?"
― 첫 특공대원 세키 유키오가 기자에게 남긴 말
"전쟁 중 '천황폐하 만세'(天皇陛下 萬歲), '대일본제국 만세'(大日本帝国 万歳)를 외치며 죽었다고들 하는데 난 그런 전우는 단 한 명도 보질 못했어요. 모두가 마지막 순간 '엄마'(おかあさん)를 외치더군요."
― A6M 조종사였던 하라다 가나메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증언
"그저 병력을 소모시킬 뿐이 아닌가?"
― 당시 황태자 아키히토 (현 일본의 상황(上皇))가 전쟁 중 피난처에서 장교에게 카미카제 작전을 듣고 한 말. 당시 아키히토는 가쿠슈인에서 기본적인 군사학을 배우긴 했지만, 단지 12살에 불과한 초등학생이었다.
"조종사라는 고급 인력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다니. 나였으면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을 그 자리에서 쏴 죽였을 것이다."
― 전후의 더글러스 맥아더, 자신의 자서전에서 카미카제에 대한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