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 그는 왜 파계승이 되었나?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가던 중 무덤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깨달음을 얻고 신라로 다시 돌아간다.

그 후 계율을 어기고 기생집에 드나들고 머리를 기르며 파계승같은 삶을 산다. 계율을 어긴 이후에는 머리를 깎지 않고 속세의 옷을 입으며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며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말이나 행동을 험하게 하거나 술집, 기생집을 드나들기도 하고, 금속으로 된 칼이나 쇠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다니거나, 소(疏)를 짓고 강론을 하거나 사당에서 여염집에서 잠을 자고, 혹은 산, 강을 따라 좌선을 하는 등 일정한 법식이 없는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대가로 원효는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온갖 파격적인 행보를 일삼고 돌아다니다 보니, 당시 승려들 가운데는 원효를 못마땅해하는 시선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황룡사에서 인왕백고좌회라는 법회를 열었는데 고향 상주에 머무르던 원효도 추천을 받아 참석하기로 하였으나 당시 승려들이 원효의 파계 행적을 문제삼아 참석을 반대했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14년, 처음부터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된 만큼 불교는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원효가 활동하던 7세기 중엽엔 소위 불국토설과 진종설까지 등장했다. 불교는 왕실의 권위를 신성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했고 승려들은 왕실과 매우 가까이 밀착되 있었다.

왕궁 주위엔 거대한 사찰들이 지어졌고 사찰엔 국가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가 하사되었다. 대부분 귀족출신으로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은 왕궁 근처의 사찰에 머물며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법회에 주력하였다.

반면 일반 백성들의 삶의 조건은 더욱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삼국간의 전쟁은 구국을 건 싸움으로 치달았다.

계속되는 전쟁 속에 민중들은 생활의 터전을 잃었고 정신적으로도 황폐해져갔다. 그들의 삶은 거의 붕괴 직전에 있었다.

이런 시대배경 속에 서서히 민중불교가 싹트고 있었다. 민중불교 전파자들은 저작거리를 떠돌거나 당시의 수도이던 경주를 떠나 지방에 절을 지었다. 원효는 이런 승려들과 뜻을 같이 했다.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보는 부처의 가르침과 귀족위주인 신라 불교의 현실 사이에서 원효는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치열한 고민과 무색 끝에 그는 새로운 길을 찾는다. 문자를 알지 못하는 민중들에게 지극정성으로 부처님의 이름을 10번만 외면 극락왕생 할 수 있다고 설파해 무언의 희망을 준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그의 외침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원효의 무예행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민중들에게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계율을 어기고 불명예를 감수하면서 까지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 계기는 금강삼매경론의 저술이었다. 이 경이 처음 발견 되었을 때 경에 주석을 붙이는 작업을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원효만이 단 삼일만에 그일을 해냈다고 한다.

원효는 백고좌법회가 열리는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론을 강론하게 된다. 그리고 백고좌법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지난 날을 빗대어 일갈한다. 교학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원효의 권위를 부인 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