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명장, 미나모노토 요시츠네

일본 겐페이 전쟁기의 무장. 아명은 우시와카마루(牛若丸). 존호는 차니왕 통칭이 '쿠로'라서 '미나모토노 쿠로 요시츠네'로 불리는 일이 많고, '겐쿠로 요시츠네'로 불리기도 한다.
키와치 겐지의 동량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교토에서 이름난 미녀 토키와 고젠 사이에서 출생했다. 미나모노토 요리토모의 동생. 어머니의 미모 덕분에 미청년으로 알려져 있고, 남겨진 초상화에도 대부분 귀족적인 겐지의 귀공자로 그려져 있다. 다만 그의 초상화는 당대에 그려진 것이 아니고 모두 전국 시대에서 에도 시대 사이에 그려진 것들이 많으며, 무용담과 전설에 다분히 영향을 받은 것.

요시츠네 4천왕이라든가 시즈카 고젠과의 로맨스가 유명하다. 그리고 동상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전설이나 무용담에서는 점프력이 뛰어난 인물로 나타나곤 한다. 무사시보 벤카이와 고죠 대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 묘사를 보면 벤케이의 공격을 피해 점프해서 다리 난간에 착지한 것도 있고 단노우라 전투에서는 집중공격을 피해 배와 배 사이를 뛰어다니며 도망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이른바 팔척뛰기 전설이다.
-유년기
겐지의 지도자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9번째 아들(九郞)로 태어났지만 아기 때 헤이지의 난에 휘말려, 아버지 요시토모는 오와리 우츠미에서 부하 오사다 타다무네에게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다.

이때 어머니 토키와 고젠이 헤이케 세력의 수장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의 첩으로 들어가는 대신 아들들의 구명을 요구하였고, 키요모리의 계모로 헤이케의 큰어른이던 이케노젠니(池禪尼)가 자신의 죽은 아들 이에모리(家盛)과 닮았다는 이유로 겐지의 구명을 요구하는 등의 일이 겹쳐서, 요시츠네도 다른 겐지 일족들처럼 목숨만 붙은 채 쿠라마 산의 쿠라마데라(鞍馬寺)에 유폐되었다.

이때 쿠라마 산의 텐구인 키이치 호겐의 딸과 밀통해 키이치 호겐이 가진 육도와 삼 등의 병서를 훔쳐내 배웠다든가, 무술을 전수받아 달인이 되었다는 등의 전설이 있다.
후일 출가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히라이즈미로 도망쳐 그곳에서 독자적인 정권을 구축한 오슈 후지와라씨의 3대 당주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에게 의탁했다. 가는 도중에 아버지 요시토모가 숨을 거둔 오와리에서 원복(관례)을 치르고, 요시츠네(義經)라는 이름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겐지의 대장군

1180년 형인 미나모노토 요리토모가 거병하자 이에 오슈에서 돌아와 후지가와 전투에서 막 헤이케에게 승리를 거둔 요리토모를 대면하고, 이후 겐지 군의 사령관이 되어 요리토모의 선봉에 선다.
한편, 헤이케는 겐지의 또 다른 세력인 미나모노토 요시니카에게 쿠리카라 고개 전투에서 참패하여 1183년 수도인 교토를 버리고 도주하였다(都落ち).
요시나카는 요리토모와 아슬아슬한 연합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본인의 행정능력이나 정치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데다가 군기가 잡혀 있지 않는 야만스런 군대를 이끌고 교토에 주둔해 교토는 삽시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노련한 책략가였던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시나카가 제 입맛대로 조정과 황가에까지 손을 뻗치는 것을 막으려고 하다가 요시나카에 의해 감금당했고, 요리토모에게 SOS를 보냈다.
요시츠네는 교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우미 근처까지 진군하여 이를 요리토모에게 하나하나 보고하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결국 요시나카는 요리토모를 제끼고 자기가 겐지의 수장이라 선언해서 요리토모를 적으로 돌리는 등 자폭에 가까운 짓만 되풀이하다 인심도 잃고 군대도 대부분 흩어진 상태에서 1184년 우지가와 전투에서 전사했고, 요시츠네는 교토에 입성했다.
- 이치노타니 전투와 임관

헤이케는 겐지 가문끼리 동족상잔을 벌이는 동안 가문의 기반이었던 사이고쿠에서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여 군대를 후쿠하라까지 진출시켰다.
헤이케는 늘 그렇듯이 상당한 대군을 이끌고 있었는데다 이치노타니라는 곳에 진을 쳤는데, 이곳은 북쪽은 험난한 절벽을 끼고 있어서 접근이 불가능했고, 동쪽과 서쪽은 좁은 데다 방어망이 튼튼해서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으며, 남쪽의 해안에는 해양 세력이었던 헤이케의 대함대가 기다리고 있어서 아예 논외였다. 그야말로 우주방어를 구현한 거점이어서 겐지 군은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요시츠네는 정찰을 나가서 사슴이 북쪽의 절벽을 오고 간다는 소리를 듣고 어? 그러면 말도 갈 수 있겠는데?라면서 단 70기의 기병만 이끌고 절벽을 뛰어 내려가서 헤이케를 기습했다. 겐페이 합전 내내 병사들이 영 오합지졸인 감이 있던 헤이케는 바로 모랄이 나서 처참히 패주했고, 요시츠네의 이름은 본격적으로 유명해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가케오토시(崖落し)"
이후 요리토모의 일차적인 논공행상이 이뤄지는데, 미나모토노 노리요리 등 겐지의 장수들이 장원을 하사받았던 데 비해 요시츠네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역사서인 《아즈카가미(吾妻鏡)》에서는 요시츠네가 보상을 강하게 바라고 있었는데 요리토모가 일부러 허가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 이때부터 요리토모의 요시츠네 견제와 푸대접이 시작되었다.
이후 요시츠네는 겐페이 전쟁의 제일선에서 물러나 교토에 거주했는데,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에몬노죠(左衛門少尉)의 관위와 함께 게비이시(検非違使)의 한간(判官)[이라는 관직을 받았다. 하지만 이 관직이 나중에 요시츠네의 목숨을 빼앗게 되었다. 가와고에 시게요리(河越重賴)의 딸인 사토 고젠(鄕御前)을 정처로 맞은 것도 이때인데, 요리토모가 주선한 결혼이었지만 이 사토 고젠은 나중에 요시츠네와 죽음까지도 함께 한다

- 야시마 전투

요리토모는 요시츠네를 견제하려고 교토에 남겨 두며, 노리요리를 총사령관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노리요리가 이끄는 겐지 군이 제해권을 완전히 쥐고 있는 헤이케 군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자, 결국 요리토모는 요시츠네를 다시 기용했다. 요시츠네는 1185년 초, 다시 법황에게 상주하여 헤이케 토벌의 최전선에 섰다.

헤이케의 본진은 지금의 시코쿠 사누키 지방에 있는 야시마였는데, 제해권을 쥐고 있는 헤이케와 바다에서 싸울 방법도, 바다를 건널 방법도 전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요시츠네는 쿨하게 폭풍이 불면 적들은 우리가 안 보일 거고, 폭풍에 몸을 실으면 졸라 빨리 도착하겠네? 라는 역발상을 하고 두려워하는 선원들을 위협해서 바다로 내몰아버렸다. 그리고 폭풍우 덕에 보통 3일은 걸리는 항로를 4시간 만에 돌파해서 시코쿠에 상륙했다. 야시마 남쪽 아와에 상륙한 요시츠네 군은 헤이케 군이 겐지 측에 붙은 지방 호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가느라 본진인 야시마에 병력을 거의 남겨 두지 않았다는 정보를 얻고 즉석에서 전격전을 개시했다. 요시츠네 군은 주변 민가에 불을 질러서 대군인 척 하고 본진을 급습했고, 헤이케 군은 대혼란에 빠져서 단노우라 쪽으로 도망쳤다.

이때 배로 도망치던 와중에 헤이케 군은 미녀에게 부채를 들게 하여 겐지를 약올렸는데, 요시츠네는 이걸 보고 용맹으로 유명하던 부장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에게 "저 부채를 활로 쏴 맞혀라. 맞히지 못하면 겐지의 망신이다"라고 했는데, 시게타다는 못 하겠다며 부하인 나스노 쥬로에게, 쥬로는 다시 부상을 이유로 자기 동생인 나스노 요이치에게 서로 미뤘다. 결국 요이치가 어쩔 수 없이 "나무 하치만 대보살!" 하고 외치면서 활을 쐈는데 그게 부채에 명중했다! 그걸 보고 열받은 헤이케의 무사가 부채가 있던 자리에서 겐지를 약올리며 춤을 추자, 요이치는 이 무사까지 쏘아 죽였다! 헤이케는 완전히 사기가 꺾였고 겐지 군은 환호했다.

요시츠네가 출진하기 전에 겐지의 참모였던 카지와라노 카게토는 사카로우(逆魯)라고 하는 후퇴용 보조 노를 달자고 주장했으나, 요시츠네가 도망갈 수단이 있으면 사기가 저하된다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카게토키는 요시츠네를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설 줄 모르는 멧돼지 같은 자라며 비난하여 큰 다툼이 벌어졌다. 게다가 카게토키는 폭풍이 부는 바다로 나가려는 요시츠네를 미치광이로 취급하며 날씨가 개는 걸 기다려 천천히 출항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로 나가자고 칼을 빼들고 소리치는 사령관이 참모의 눈에 미친 놈으로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카게토키가 함대를 이끌고 도착하니 이미 야시마 전투는 겐지의 승리로 끝나 있었고, 기다리고 있는 건 기고만장해 있는 요시츠네와 군사들의 '6일의 창포'라는 비웃음 뿐이었다. 이에 카게토키는 깊은 원한을 품게 되는데, 카게토키가 겐지 정권의 2인자로 꼽히는 요리토모의 심복에, 참소와 숙청 매니아였기에 겐페이 전쟁이 끝난 뒤 요시츠네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 단노우라 결전과 헤이케 멸망

헤이케의 해상 거점은 야시마 이외에도 나가토의 히코시마가 있었는데, 헤이케는 요시츠네의 기동전에 연전연패를 당하고 요시츠네의 승리로 움직임과 보급이 자유로워진 노리요리의 대군이 진출하면서 히코시마에 갇혀버렸다.
게다가 요시츠네는 이번 결전이 헤이케의 세력을 물리적으로 괴멸하는 마지막 일전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토 내해의 토착세력인 쿠마노 수군, 코노 수군 등을 끌어들인 840여 척의 대규모 선단을 편성해 이번만은 소규모 전력을 이용한 기만 전술이나 기습이 아니라 대규모 결전을 준비했다.
전투 준비단계에서 카게토키는 무사에게 큰 명예가 되는 선봉을 맡겨 달라 청원했는데, 요시츠네는 자기가 선봉을 하겠다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카게토키는 자기 공로를 뺏으려고 그런다 생각했는지 총대장이 선봉을 서는 경우가 어딨냐. 저건 무사 감도 못 된다라며 폭언을 내뱉었고, 양측의 가신들이 거의 유혈사태 직전까지 치닫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둘의 사이는 이미 빼도 박도 못할 철천지 원수가 되어 있었고, 이것이 나중에 요시츠네가 비운의 죽음을 맞는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양군은 1185년 3월 24일 정오 간몬 해협에서 격돌했다. 초전에는 해상 세력인지라 바다를 잘 알고 조류의 흐름을 이용한 헤이케 세력이 겐지 군에게 우세를 점하며 쭉 밀어냈다. 그러나 물결이 바뀌고, 요시츠네가 당시는 비전투원으로 취급되어 살상행위의 대상이 아니었던 노잡이/키잡이를 조준사격할 것을 명령하여 전세가 뒤바뀌었고, 헤이케 세력은 괴멸당했다.

요시츠네는 헤이케의 맹장이 육박전을 걸어 오자 순식간에 8척의 배를 뛰어 건너서 도주하는 묘기를 선보였는데, 이게 그 유명한 팔척뛰기(八艘飛び) 고사다.

헤이케의 주장이던 타이라노 토모모는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볼 것은 다 보았다" 라는 말을 남기며, 갑옷을 두 벌 껴입고 닻을 짊어진 채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고, 사령관이던 타이라노 무네모리는 시녀, 헤이케 일족의 여자들, 신기 쿠사나기의 검을 껴안은 안토쿠 덴노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죽기 무서워졌는지 허우적거리다가 살아나 구조된다.

이는 위의 토모모리가 자신은 헤엄을 잘치니 갑옷 한 벌만 입고 뛰어들면 살지도 모르니까 두 벌의 갑옷을 입고 닻을 껴안은 채 뛰어내린 것과 비교된다. 극도의 무능함으로 헤이케의 패인이 된 무네모리에 대해 우호적인 서술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 사서에는 대부분 죽으려고 뛰어들었는데 뛰어들어 보니 죽기 무서워져서 헤엄쳐 살아났다든지, 비만으로 인해 잠수해 죽으려고 해도 자꾸 물에 떠올라서, 그러다 잡혔다.라고 써 있다.

무네모리의 어머니이자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후처인 니이노아마 타이라노 토키코는 어디로 가느냐 묻는 안토쿠 덴노에게 "아미타불의 정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파도 속에도 도읍이 있나이다"라는 비감 어린 유언을 남기고 투신했다. 이로써 헤이케는 완전히 멸망했고, 헤이케 토벌은 끝이 났다. 이후에도 도깨비게 등 헤이케 잔당과 관련된 각종 전설이나 헤이케의 후손을 자칭하는 여러 호족이 각지에서 나타났지만 헤이케의 정권은 다신 나오지 못했으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아시카가 다카우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쇼군직을 계승하려면 겐지의 후계여야 한다는 암묵의 룰이 생긴다.
- 코시고에 장과 숙청

그런데 수도에 돌아오자 상황은 요시츠네에게 나쁘게만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선 요시츠네에게 원한이 가득가득 쌓여 있었던 카게토키는 교토에 귀환하자마자 요리토모에게 "요시츠네는 자기가 공은 다 세운 양 군다"라든가 하는 험담에 가득 찬 서찰을 보내기 시작했고, 막부의 2인자였으며 여러 사람을 참소해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만큼 권한이 막강했던 카게토키의 참소에 요시츠네의 기반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게다가 일전에 요시츠네는 케비이시 호간의 직책을 받아버렸는데, 이것은 조정이 무사들을 분열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서로 싸우게 만들기까지 하던 책략가 고시라카와 법황을 극도로 경계한 요리토모가 절대 금기시한 이른바 '무단임관'으로, 요리토모의 중개나 사전 승인을 받지 않은 관직이었다. 애초에 요리토모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깡촌이나 다름없는 간토 지방에 막부를 연 것도 조정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무사 정권을 수립하고 싶어서 고심한 끝에 내놓은 비책이었는데, 요시츠네는 형의 속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요리토모는 겐페이 전쟁 중 무단임관을 한 무사들을 격하게 비난하고 가마쿠라에 입성하는 것을 금하는 서찰을 각지로 보냈는데, 여기엔 요시츠네도 포함되어 있었다. 놀란 요시츠네는 포로로 잡힌 타이라노 무네모리를 호송한다는 구실로 가마쿠라에 들어가 직접 형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탄원하려고 했지만, 가마쿠라의 외곽 경계선인 코시고에에서 발이 묶였다. 이에 요시츠네는 피눈물로 형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서찰을 써서 막부의 중신이자 이름높은 정치가였던 오오에노 히로모토(大江廣元)에게 보냈는데, 이 서찰이 바로 코시고에 장이다. 후출사표처럼 위작의 의심이 있으나, 일본사에서 손꼽히는 명문다. 메이지 시대에는 서예 교과서에도 쓰였다고.
그러나 이 서찰을 요리토모는 읽어 보지도 않았고, 냉혹하게 요시츠네를 내쳤다. 요시츠네는 마음 한 가득 억울함과 비탄을 안고 쓸쓸히 교토로 돌아가야만 했다. 요시츠네는 교토로 돌아가면서 "관동에 원한을 가진 자는 요시츠네를 따르라"는 말을 남겼다. 이 이야기는 요리토모의 귀에 들어갔고, 분노한 요리토모는 요시츠네에게 맡겼던 옛 헤이케의 영지를 몰수했다고 한다.
요시츠네는 홀로 교토에 돌아와 슬픔과 분노로 병을 앓게 되었는데, 원수였던 카게토키의 아들 카게스에가 당시 요리토모에게 반기를 들고 잠적해 있던 미나모토노 유키이에 토벌의 안건으로 요시츠네를 방문했다. 요시츠네에게 카게스에를 보낸 이유는 당연히 요시츠네가 모반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염탐하러 보낸 것.
하지만 요시츠네는 병이 무거워 이틀이나 만남을 미루었고, 이틀째에도 다 죽을상을 하고 간신히 만나 몸 상태가 이러니 유키이에 토벌은 미루자고 했다. 카게스에가 이렇게 보고하자 카게토키는 이를 옳다꾸나 하고 극도로 왜곡해 이틀 후에 만나자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이틀 동안 굶어서 낯빛 나쁜 척 하면서 유키이에 토벌을 미루자고 했을 것이다. 뒤로 유키이에와 내통하고 모반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며 참소한다. 이에 요리토모는 자객을 보내 요시츠네를 죽이라 지시한다. 형제의 사이가 완전한 전면전으로 돌입한 것.

- 도망, 그리고 죽음
암살 시도는 미수로 끝났고, 격노한 요시츠네는 자객을 손수 참수하며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리토모 토벌 허가를 받아 유키이에와 협력하여 병사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무사들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반면, 요시츠네는 무사들에게는 인기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응하는 병력이 너무나 적어 실패하고 오슈지방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각지에 요시츠네와 연관된 전설과 에피소드, 유적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가부키로도 남아 있는 칸진쵸(勧進帳)이다

칸진쵸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오슈로 도망치던 요시츠네 일행은 코야히지리로 변장해 칸진쵸를 전하러 간다는 구실로 요리토모 군이 지키는 관문을 지나려고 했지만 칸진쵸 인증을 요구받게 되었고, 물론 그런 것이 없는 일행은 난관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러자 승려 출신의 벤케이가 기지를 발휘해 아무것도 없는 백짓장을 들고 진짜 칸진쵸를 든 양 내용을 순간적으로 꾸며내 읽었다. 그리하여 위기를 지나치려는 찰나, 이번에는 시종으로 변장했던 요시츠네가 종답지 않게 귀족적인 외모로 의심을 사게 되었고, 벤케이가 다시 기지를 발휘해 주군인 요시츠네를 "너 때문에 가는 곳마다 의심을 받지 않느냐"라며 마구 두들겨패 "부하가 주군을 저렇게 팰 리가 없다"라고 생각한 경비병들에 의해 위기를 넘기는 이야기이다.

이외에도 도망치는 도중 해상에서, 단노우라 결전에서 전사한 헤이케의 타이라노 토모모리의 유령을 만나 배가 난파하려 하자 승려인 벤케이가 염불로 퇴치하는 이야기 등이 유명하다. 요시츠네가 해로를 택하지 않고 기나긴 육로의 도피행을 택한 데 대한 민간의 해석인 듯하다.

이후 히라이즈미로 무사히 도망쳐서 일전 요시츠네의 보호자였던 오슈 후지와라가문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에게 몸을 의탁했으나 히데히라는 곧 병사하고 말았다 히데히라는 후계자인 아들 후지와라노 야스히라에게 "요시츠네와 협력할 것, 굴복하지 말 것, 적이 시라카와 관문을 넘으면 바로 격퇴할 것"을 당부하고 숨졌다.

그러나 요리토모가 군대를 보내 시라카와 관문을 돌파하자 반격할 것을 주장하는 요시츠네와 자신의 형제인 쿠니히라·타다히라에 대해, 심약한 겁쟁이였던 야스히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요리토모의 압력에 굴복하여 요시츠네를 보호하여 결사 항전할 것을 주장한 타다히라와 요리히라를 모살하고 500여 명의 군사를 보내 요시츠네를 습격한다.

결국 요시츠네는 코로모 강가에서 후지와라의 추격병에 둘러싸여 부인과 4살짜리 딸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향년 31세. 충실한 심복 벤케이가 이때 주인을 지키며 온몸에 화살을 맞아 선 채로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는 전설이 유명. 이후에도 요시츠네의 애첩이던 시라뵤시(白拍子) 시즈카 고젠이 요시츠네를 찾아 헤매다가 지치고 병들어 쓰러져 죽었다고도, 그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냈다고도 하는 애처로운 후일담이 각지에 전해진다.
당연히 겁에 질려 자기 양팔을 잘라버린 야스히라가 정권을 유지할 수도 없었고, 냉혹한 요리토모는 자신에게 굴종했다고 해서 야스히라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가마쿠라의 군대는 번성했던 히라이즈미를 무자비하게 불살라 버렸고, 한때 교토에 비유되며 영화를 누리던 대도시 히라이즈미는 이후 다시는 그렇게 번성하지 못했다. 야스히라 본인은 비참하게 도주하다가 부하 가와타 지로(河田次郎)에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