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죠르죠 바사리, 석판에 유화, 1570-2
고대 그리스.
아르고스의 국왕 아크리시우스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고민하다 델포이 섬의 신관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땅끝에서 자기 외손자의 손에 살해당하리라는 신탁을 받게 됩니다. 겁에 질려 도망치듯 아르고스로 돌아온 아크리시우스는 곧 신하들을 시켜 탑 아래 깊은 곳에 청동으로 감옥을 짓고는 하나뿐인 딸 다나에를 가두고 여전사들로 하여금 그 어떤 남자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게 했어요. 제우스는 구름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황금빛 빗줄기로 변신해 감옥의 틈 사이로 스며들어 그리스 역사상 최초의 반지하 침수 사고를 냅니다 다나에를 흠뻑 적셨는데, 그리로부터 예언은 실현되어 곧 다나에는 페르세우스를 낳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이 사실을 알게 된 아크리시우스는 딸과 외손주를 차마 죽이진 못하고 상자에 가두어 바다에 던져버리는데, 다행히 제우스의 언질을 받은 포세이돈의 보살핌 덕분에 두 사람을 담은 상자는 저 멀리 세리포스의 바닷가에 닿게 되고, 곧 그곳의 왕 폴리덱테스의 동생인 어부 딕티스의 손에 낚여요.
폴리덱테스는 다나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져 몇 번이고 끈질기게 구애했지만 다나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이에 상심한 그는 페르세우스가 괴물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 자신에게 바친다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눈엣가시인 페르세우스를 먼저 제거하고 다나에를 강제로 취하려는 수작이었죠. 그러나 그는 세 신의 도움으로 (아테나로부터 거울 방패를, 하데스로부터 도깨비 감투 투명화 투구를, 그리고 헤르메스로부터 날개 달린 샌들을 협찬받았어요) 메두사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석화 광선을 뿅뿅 내뿜는 잘린 머리를 자루에 담아 들고 세리포스로 돌아가는 길에 페르세우스는 바닷가 바위에 쇠사슬로 묶인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안드로메다로 에티오피아의 왕 케페우스의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카시오페아는 자신의 외모를 과신한 나머지 감히 요정들의 아름다움에 비견할 수 있겠다는 망언을 내뱉은 적이 있었는데, 이에 분노한 요정들이 커다란 바다괴물을 한 마리 보내 에티오피아의 항구와 바닷가의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케페우스는 바다괴물의 백도어를 멈추려면 딸 안드로메다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신탁을 받습니다.
이제 그림을 봅시다. 뭐가 보이나요?

중앙의 남자는 페르세우스입니다.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있는데다 발치에는 거울 방패도 떨어져 있어요. 바로 옆의 안드로메다를 막 풀어주고 있는 참입니다. 그런데 괴물은? 페르세우스의 왼쪽, 바다 위 둥둥 떠 있는 거무스름한 형체가 보이나요? 목을 꿰뚫은 창이 비죽 솟아 있습니다. 전투가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거죠. 똑같은 주제로 피에로 디 코시모가 그린 그림을 보며 비교해 봅시다 (아래).

기승전결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쌓아나가며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글과는 달리 그림은 오직 한 장면을 통해서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요. 많은 화가들이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여러 방법을 시도했는데, 피에로 디 코시모는 총 세 명의 페르세우스를 한 폭에 다 담았습니다. 오른쪽 위에서부터 괴물에게 다가가는 페르세우스, 중앙에서 괴물과 싸우는 페르세우스 그리고 왼쪽 위에서 안드로메다와 사랑을 나누는 페르세우스. 그림의 하단에도 슬피 우는 사람들과 (왼쪽) 즐겁게 춤추며 축하하는 사람들이 (오른쪽) 함께 그려져 있죠. 이런 방식을 narrazione continua / continuous narrative 라고 부르는데, 바사리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지만 보는 사람들이 헷갈릴 수 있다는 이유로 사용하기를 꺼렸어요. 그는 대신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관찰하며 발견할 수 있는 작은 단서들을 곳곳에 남겼죠. 죽어 있는 바다괴물이라던가, 안드로메다의 발치에 놓인 메두사의 머리라던가.
죠르죠 바사리의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들, 프란체스코 1세의 개인 서재를 장식했던 수많은 그림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 시대 유럽 귀족과 학자들 사이에서는 저택이나 별장의 비밀 방을 개인 서재로 꾸미는 게 유행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처음의 의미는 퇴색되고 점차 귀중품을 보관하는 개인 전시장 내지 금고로 변질되었어요. 프란체스코 1세는 저명한 연금술사이자 과학자였으며 특히 화약 연구를 비롯한 화학을 좋아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자신의 서재에 주로 보석이나 광물 등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졌던 돌멩이들을 잔뜩 보관했었습니다. 사진을 봅시다. 피렌체 팔라쪼 베끼오 내부에 위치한 프란체스코 1세의 서재인데, 그는 어디다 그 많은 기암괴석을 두었던 걸까요? 바닥에??

사실 이곳 서재 벽의 거의 모든 그림 뒤에는 텅 빈 서랍장이 자리했습니다 (하나는 비밀계단과 연결된 통풍구였음). 그림은 서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려주는 표지 역할이었죠. 그렇다면 바사리의 그림 뒤 서랍에는 무엇이 들어있었을까요? 첫 번째 그림을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