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링겐 상공 공중충돌 사고

사고 발생 3개월 전, 샤르자 국제공항에서 찍힌 바시키르 항공 2937편의 사진

사고 발생 7일 전, 브뤼셀 국제공항에서 촬영된 DHL 611편의 사진
이 글은 2002년 7월 1일 오후 11시 35분 52초(중앙유럽 서머타임 기준) 독일 남부 위버링겐에서 발생한 공중 충돌 사고를 다루고 있습니다.

7월 1일, 러시아 모스크바발 바르셀로나행 바시키르 항공 2937편 여객기와, 이탈리아 베르가모에서 이륙해 브뤼셀까지 날아가던 DHL 항공 611편 화물기는 각각의 항공로를 따라서 목적지를 향해 비행하고 있었다.
당시 취리히 항공 관제를 맡고 있는 회사는 스카이 가이드라는 스위스 국영회사였다. 당시 그 구역에 배치된 관제사는 단 두 명이었는데, 11시 15분경 한 명이 휴식을 취하러 가자 덴마크 출신 관제사인 페테르 닐센 혼자서 두 구역을 관리하였다.
그 뒤 레이더 점검을 위해 레이더 반응이 느려졌다. 이후 관제사는 전화마저 쓸 수 없었는데, 항공기와 교신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다른 관제 센터와 통신은 불가능해졌다.
이후 바시키르 2937편은 독일에서 스위스로 관제 센터가 바뀌었고, 이 순간 DHL 611편도 스위스 영공에 들어섰다. DHL 611편읃 연료절감을 이유로 고도상승을 요구했고, 관제사는 36,000 ft까지 상승을 허가했다.
다만 이때 바시키르 2937편 역시 36,000 ft를 비행중이었다.
물론 두 항공기가 설마 공중충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충돌 몇 분 전, 에어로 로이드 1135편의 지연된 등장으로 관제사는 도착지 공항에 이를 알리기 위해 전화를 시도하지만 점검으로 인해 여러 차례 실패했다. 또한 이 연락시도가 예상보다 길어진 탓에 그동안 다른 비행기로부터 온 연락을 모두 놓치고 말았다. 에어로 로이드 1135편을 유도하기 위해 옆자리로 옮겼고 관제사는 결국 두 자리에서 항공기 3대를 관제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보통 이 상황에서는 다른 관제 센터에 타 항공기를 넘기지만, 시스템 점검 때문에 타 센터와 연결이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인 것은, 평소라면 관제사가 ACAS(항공기 충돌 경보 시스템)으로부터 이른 시기에 경고를 받을 수 있어야 했음에도 레이더 점검으로 인해 ACAS의 경보가 작동하지 않아 제때 위험을 알리지 못하게 되었다.
180km 떨어진 독일의 관제 센터에서는 ACAS를 통해 두 항공기간 충돌 위험을 감지했지만 다른 관제구역의 항공기에 연락함은 엄격하게 금지되었기 때문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구경만 하지는 않고, 스위스 스카이 가이드 측에 연락을 11차례 시도했으나, 충돌 1분 전인 34분까지 전화는 먹통이었다.
평온하게 비행하던 양 비행기는 서로의 TCAS(공중 충돌 경보 시스템)가 울리자 당황했다.

TCAS는 두 비행기가 충돌궤도에 있을 경우 TCAS 자체가 상호간 통신으로 어느 쪽이 상승하고 어느 쪽이 하강할지 결정한 후 각각 하강과 상승을 지시함으로써 충돌을 피하게 한다.
이 때 TCAS는 DHL 611편에게 하강을 지시했고, DHL 611편은 이에 따랐다.
하지만 관제사는 바시키르 2937편에게 하강을 지시했고, DHL 화물기에는 별도의 지시없이 바로 에어로 로이드 1135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문에 DHL 화물기가 TCAS 경보에 따라 하강한다는 보고를 듣지 못했고, 사고가 일어난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관제소의 닐센은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었고, 다른 모니터를 보며 다른 항공기가 착륙하도록 유도하는데 몰두하였다.
대부분 서방 여객기는 TCAS를 우선으로 믿지만, 바시키르 2937편은 관제사의 말을 따라 35,000 ft로 하강했다.
DHL 611편에서는 TCAS의 지시에 따라 고도를 변경했는데도 계속 충돌경보가 울리자 관제소에 연락을 시도했지만 닐센은 이를 듣지 못했다. 결국 두 항공기는 운명의 시간을 불과 몇 초 앞 둔 시점에서야 육안으로 서로를 발견하고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지만 이미 대응할 시간이 없었다.

DHL기는 바시키르 2937편의 바로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지만 결국 수직꼬리날개가 바시키르 2937편과 충돌하면서 동체를 반으로 갈라버리고 말았다. 또한 그 충격으로 DHL611편의 수직꼬리날개가 날아간다.

바시키르 2937편은 대응할 방법도 없이 공중에서 두동강 나서 추락했고, 편안한 비행 속에 안전벨트도 매지 않았던 승객들은 하늘로 던져졌다. 위버링겐 상공에서는 3 km 밖에서도 볼 수 있는 거대한 화염이 보였다고 한다. 산산조각이 난 바시키르 2937편의 잔해는 충돌지역에서 수백m에 달하는 지역에 흩뿌려졌다.

DHL 611편은 바시키르 2937에 비해 덜 파괴됐지만, 수직꼬리날개가 파괴된 이상 기체 안정화는 불가능했고, 결국 추락해서 전원이 사망했다.
사고 원인 1 : 과도한 인건비 절감
당시 스카이 가이드는 관제사를 2명만 배치했는데, 한 명이 휴식을 위해 자리를 비운 탓에 관제사 단 한 명이 항로관제와 접근관제를 모두 책임져야 했다. 트래픽을 많이 겪어 단련된 관제사라도, 두 콘솔 사이를 오가며 항공기 여러 대를 관제하는건 바쁜 시간대에는 불가능에 가까우며 한가한 시간대에도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2명 이상의 관제사가 반드시 상주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여기에 2명만을 배치한 스카이 가이드의 과실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애시당초 적절한 인력 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사고 원인 2 : 시스템 점검과 관제 실수
관제사는 위의 업무 과중에 더해서 시스템 점검으로 인해 관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전화 시스템 점검과 백업 시스템의 고장으로 인해 에어로 로이드 1135편의 착륙유도를 공항측에 이양하지 못하고 떠맡고 있었으며, 공항에 수차례 전화시도를 하느라 시간과 신경을 뺏기고 있었다. 이에 더해 지상의 충돌 감지 레이더까지 유지보수에 들어가 관제사 측의 단기 충돌 경보(STCA)가 작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사항은 관제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 결과 두 항공기가 접근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1분 전에서야 알아버렸다. 에어로 로이드 1135편이 착륙하자 DHL 보잉 757 화물기와 바시키르 2937편에 집중하려고 돌아왔으나 이미 충돌이 일어난 후였고 레이더 모니터에는 바시키르 2937편으로부터 레이더 시그널이 끊어졌다는 빨간 점만이 떠있을 뿐이었다.
사고 원인 3 : ICAO의 직무유기와 국가별 운항가이드의 차이
이 사고 전에도 이미 TCAS와 관제사의 지시혼선으로 충돌위기 상황이 몇 번 있었다. 미국은 FAA 규정으로 이 경우 TCAS 경보대로 우선조치하고 관제사에게는 후보고함을 규정으로 정했다. 하지만 유엔 산하 국제민간항공기구인 ICAO는 관제사의 지시와 TCAS 중 어느 것을 우선하는지 규정이 없어서 각자의 판단에 따를 뿐이었다.
사건 이후
관제사 페테르 닐센은 이 사건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닐센은 스카이 가이드의 매니지먼트 잘못으로 인한 피해자였다. 닐센과 같이 일하고 있어야 했던 관제사는 쉬고 있었다. 즉, 두 명이 해야 될 일을 닐센 혼자서 워크스테이션 두 개를 돌아다니면서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페테르 닐센은 이 사고 후 다시는 관제사로 돌아오지 못했고, 관제업무가 아닌 다른 백 오피스 업무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우울증에 걸려 취리히 근교의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렇게 지내던 중 2004년 2월, 이 사고 피해자의 유가족인 비탈리 칼로예프(Виталий Калоев)에게 살해당했다.
칼로예프는 러시아 연방 북오세티야 공화국 사람으로, 칼로예프의 부인과 두 자녀가 해당 비행기에 탑승하여 사고를 당했다.
칼로예프는 수색대가 아직 딸의 시신을 찾지 못한 것을 알고 직접 현장을 헤매다가 결국 자신이 딸아이의 시신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이후 우울증에 빠져 가족들의 묘지를 떠나지 못할 정도로 사실상 폐인이 되었다.
칼로예프의 진술에 의하면, 수소문 끝에 찾아간 닐센의 집에서 신경질적인 응대를 당하고, 거기다 사망한 자녀의 사진이 바닥에 던져진 것에 격분해 칼을 휘둘렀다고 한다. 칼로예프는 자신이 행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처벌이었다고 주장하였다.
페테르 닐센은 살해당할 당시, 아내와 어린 세 자녀가 있었다.
이후 칼로예프는 2005년 스위스 법원에 의해 8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사건 당시 정신상태를 참작하면 판결이 올바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4분의 1 형량인 2년만 복역하고 가석방되었다. 그 이후 칼로예프는 고향에서 암암리에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귀국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북오세티야 공화국의 건설부 차관으로 임명되기까지 했다. 2018년, 칼로예프의 이야기를 담은 "Unforgiven (Непрошенный)"이란 영화가 개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