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 진동하는 초등학교 놀이기구
본 게시글은 작성자의 유년시절 기준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우리네의 초딩 시절이라 함은 격정과도 같은 과도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콤퓨타실에선 한컴타자연습을 끝낸 뒤에 선생님 몰래(사실 다알고있음) 후뢰시맨, 피카츄배구, 포켓몬 골드, 건물뿌수기 등을 즐기고 하교하면 태권도장, 피아노 학원을 거쳐 집에서 크레이지 아케이드, 웜즈, 메이플스토리 등을 즐기며 본격적인 디지털 세대의 서막을 알렸다.
하지만 디지털 매체가 우리들의 몸을 나약하게 쇠퇴시켰냐 함은 전혀 옳지 않은 이야기라 단언코 말할 수 있겠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디지털 매체를 마음껏 영위할 수 있는 시간은 매우 한정적이었던 것이다.
하여 개중에서도 특히나 초등학교를 피비린내로 물들이는 대악마의 단련기구 몇가지를 나열해보고자 한다.
- 통곡의 벽

언뜻 보기에 밧줄을 잡고 올라가는 단순한 기구처럼 보이나, 밧줄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 기구의 본질은 밧줄을 전혀 잡지 않고 뛰어올라 정상을 정복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함에 있는 것이다. 정상에 다다르면 밧줄이 묶여있는 가로 기둥이 있는데, 달려서 오르다가 속도 조절을 잘못하여 고개를 제때 숙이지 못하면 이 기둥에 머리를 박고 스턴에 걸리기 일쑤였다. 만일 이 기구의 밧줄을 잡고 오르는 이가 있다면 그 즉시 ‘약자’로 분류되어 점차 도태될 위기에 처할 수 있다.
2. 눈 먼 자들의 요새

미끄럼틀이 달린 요새형 구조물이다. 이 기구는 미끄럼틀을 타는 용도가 아니라 술래잡기의 무대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술래의 경우 눈을 감은 상태로 구조물에 숨어든 인원들을 잡아내야 하며, 술래를 제외한 인원들은 구조물을 제외한 바닥을 밟지 않고 오로지 구조물 내에서만 술래를 피해야 하는 흡사 블라인드 데바데인 것이다. 술래는 눈을 감는 자체로 위험도가 높으며, 나머지 인원은 위태롭게 술래를 피해내야 하는 위험을 갖게 하는 요새이다. 통곡의 벽과 일체된 형태인 경우도 많다.
3. 제니의 사슬 그네

요즘 그네의 경우 고무로 코팅된 강철 케이블 혹은 밧줄로 만들어지지만 이 시절의 그네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붉은 쇠사슬로 되어있다. 그네를 탈 때는 그네 위에 올라서서 온 몸에 힘껏 반동을 주며 누가 더 높이 오르는지를 겨루곤 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슬 이음매에 손이 끼게 되면 사슬은 다시금 선혈로 코팅되어 한차례 더 붉은 빛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쇠기둥에 2~3개의 그네가 탑재되어 있는데, 모든 그네가 정상적으로 탑승 가능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의자와 사슬의 이음매가 끊어져 있거나, 그네를 개같이 돌려 감아 상단 고정 기둥에 묶인 채로 제 기능을 다 하는 것이다.
4. 원심분리 형제


원형, 구형의 두가지 버전으로 나뉜 이 원심분리 형제는 초등학생 사회의 계급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구이다. 이 기구를 이용할 때에는 돌리는 자와 타는 자로 나뉜다. 서열이 낮을 수록 돌리는 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빈도가 높다. 서열이 낮은 자들은 힘이 약해 강하게 돌리지 못하므로 타는 자들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면 간혹 서열이 높은 이기 돌리는 자를 자처하는 경우가 있는데, 서열이 낮은 이들은 타는 자 위치에서도 극강의 공포를 맛봐야 하는 것이다.
5. 절규의 절벽

이 기구는 지붕의 위쪽과 아래쪽 모두를 사용하여 절규를 자아내는 기구이다. 아래쪽을 이용하는 이들은 오로지 완력만으로 반대편까지 건너가야 하는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한다. 위쪽을 이용하는 자들은 올곧게 선 채로 중심을 유지하며 반대편까지 걸어가야 하는 서스펜스 호러를 경험하게 된다. 위쪽과 아래쪽을 동시에 이용할 경우 간혹 위쪽 이용자가 아래쪽 이용자의 손을 밟곤 하는데, 아래쪽 이용자의 즉각적인 절규에 놀란 위쪽 이용자는 추락하여 결국 두쪽 모두 절명케 하는 기구인 것이다.
6. 창살 뿐인 연옥

추락을 종용하는 이 기구야말로 지옥에 어울리는 놀이기구라고 단연코 말할 수 있다. 수직 구조물을 타고 오르는 자체로도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며 창살과 창살 사이를 이동하는 것은 더욱이 어려운 일이다. 만약 모종의 이유로 추락을 하는 날에는 공간을 가득 채운 사방의 창살의 차디 찬 허그 요청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마는 것이다.
7. 추락

창살 뿐인 연옥이 추락을 종용하는 기구라고 했던가? 이 기구는 ‘추락’ 그 자체이다. 정상까지 오로지 수직 방향으로만 올라야 하는 완강한 체력, 정상에서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집중력, 끝까지 내려가기까지 버텨내는 정신력의 삼박자가 일통하지 않는 이가 이 기구에 도전한다면 그 결과는 오로지 추락일 것이다.
이 외에도 선혈이 낭자하는 다양한 기구와 물건들이 즐비했지만 이정도로 요약해보고자 한다. 위와 같은 초교 과정을 모두 이겨내고 험준한 도시에서 살아남은 당신은 그것만으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 시절의 야성 되새기며 오늘도 자랑스럽게 살아가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