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2019
하루는 넷플릭스를 뒤지고 있었다.
내가 심심하면 가끔씩 하는 행동으로 리모콘으로 이것저것 쑤셔대다가 넷플릭스를 곱게 끄는 나만의 작은 유희이다.
그날도 역시나 신나게 만지작대다가 종국에는 끌 셈이었다.
넷플릭스 뒤지기에서 가장 재밌는 건 작품을 누르지 않고 대고 있을 때 자동으로 나오는 영상 보기인데, 이것만 빼먹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봤던 영상도 좋고 안봤던 영상도 좋다.
틀어주는 대로 봐야 하는지라 초반 전개 부분을 보기도 하고 절정의 명장면을 보기도 한다.
기대없이 봤으니 만족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이해를 못해도 그만이다.
작게 왔다가 작게 휘발해버리는 책임 없는 쾌락.
그러던 중 '의천도룡기 2019'를 발견했다.
커서를 옮긴다.
클릭하지 않는다.
자동으로 재생되는 의천도룡기만 질겅 씹고 뱉을 생각이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중국식 와이어 액션.
노란 머리 괴인이 나오는 걸 보니 사손이겠군.
그러고보니 사조영웅전, 신조협려는 읽어봤지만 의천도룡기만큼은 끝까지 읽지 않았다.
장무기가 명교 교주 되는 것까지만 보고(스포 죄송) 흐지부지됐던 게 기억났다.
사손은 어떻게 되지?
장무기는 명교와 무당파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을 할까?
갑자기 궁금증이 밀려들었다.
'의천도룡기 2019'를 클릭한다.
그리고 웅대하게 발발발거리면서 날아가는 유대암이 보인다.
2시간 즈음 지켜봤을까.
후, 재밌었다. 이제 그만 낮잠이나 잘까?
그런데 옆에서 은근슬쩍 보던 아내가 재밌다면서 포기하지 않는 게 아닌가.
바늘 가는데 실 가는 법.
어쩔 수 없이 나도 쇼파의 자리를 지킨다.
7시간이 지났다.
쇼파에는 여전히 아내와 내가 TV 앞에 앉아있다.
TV에서는 '의천도룡기 2019' 9화가 흘러나오고 있다.
슬쩍 고개를 돌려봤다.
아내는 고도의 집중을 하고 있었다.
이미 식음을 전폐했다.
다음날.
늦게 일어나보니 거실에는 '의천도룡기 2019'가 여전히 나오고 있다.
아내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마저 엿보인다.
저녁.
TV가 꺼져있다. 이제 지친 것일까?
설거지하는 아내 옆을 지나가니 맞은편 창틀에 걸어둔 스마트폰에서 '의천도룡기 2019'가 재생되고 있었다.
다다음날.
이제는 아예 거실로 이불까지 가지고 나왔다.
아내는 이불을 둘둘 말고 '의천도룡기 2019' 33화를 보고 있다.
"3일만에 50화짜리를 다 볼 셈이야?"
아내가 내쪽은 보지도 않고 화면을 응시한 채 조용히 말했다.
"그럼 안돼?"
다다다음날.
결혼식 갈 일이 있어서 아침에 집을 나섰다.
오늘은 웬일로 TV가 꺼져있다.
너무 달려서 이번에야말로 지쳤나?
이른 저녁.
외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쳤다.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본다.
넷플릭스를 켜고 '시청 중인 컨텐츠' 항목을 찾는다.
없다. '의천도룡기 2019'가 없다.
대신 새로 생긴 '의천도룡기 2019와 비슷한 콘텐츠' 항목에 '사조영웅전 2017'이 있었다.
"그럼 안돼?"
전날 아내가 되물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된다.
안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집중력, 잠재력이 무서울 뿐.
초사이어인을 경계해 '혹성 베지터'를 폭파시킨 프리더의 마음이 이해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