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2년
일본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정예병력 20만을 부산에 드랍해버린다.
대충 1만~5만 정도의 침입만 예상했던 조선은 매우 큰 충격이었고
20일만에 한양으로 가는 길이 열릴 정도로 매우 고전한다.
그러나 일본이 점령한 경상도에서 유일하게 버티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진주성이다.

딱 봐도 절벽과 해자와 강, 내성과 외성이 있는, 공격자 입장에서 X발 소리가 나오는 진주성
딱봐도 방어자 입장에서 어마어마하게 유리한 진주성의 존재로
경상도 서부 지역은 아직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때부터 일본군은 여기를 점령해야 경상도의 완전 평정과
전라도로 가는 교두보가 생긴다고 생각하게 된다.

게다가 일본군의 골머리를 앓게 한 이도 있었으니
바로 진주 판관 김시민이었다.
김시민은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의병장 곽재우, 이달과 힘을 합쳐
단 1천명의 병력으로 그 굇수 일본군을 쳐바르고
고성과 진해를 탈환해버린다.

그런데, 게릴라 전법으로 일본군을 잡은게 아니고
진짜로 조선군을 이끌고 돌격해서 일본군을 개작살내버린 것이다.....
게다가 돌격 후 재편성도 안하고, 그대로 재돌격해서 아예 창원까지 수복해버리는 등
근접전에서 썰리던 초기 조선군을 이끌고 어떻게 이런 작전으로
성공을 거뒀는지 미스테리 할 정도의 전공을 올린다.
근데 같이 싸운 곽재우는 불리한 싸움은 절대 안했던 스타일인데
같이 전공을 올린 걸 보면 명장끼린 통하는게 있나보다

아무튼 육전에서 개발리던 조선군에서
거의 유일하게 일본군을 쳐바르는 김시민에게
조정은 바로 경상도 서부와 전라도 방어에 중요한
진주 목사와 경상도 병마 절도사로 임명한다.

김시민에게 개털린 일본군 본영은
경상도 병력의 주력이 진주성에 있다고 판단
아예 대규모 부대로 진주성을 초토화 시켜버리면
경상도의 관군, 의병 세력이 꺽이고, 동시에 전라도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결론을 낸다.
그리하여 전국시대에서 나름 네임드인 호소카와 타다오키를 필두로
3만명의 대병력이 진주성으로 향한다.

일본군 대병력이 진주성으로 향하고
김시민이 진주 목사로 들어왔을 때, 진주성의 상황은 개판이었다.
전 진주목사 이경은 부하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빤스런 쳤고
병력도, 무기도 매우 부족했다.
그러나 김시민은 야전에서 구른 실력으로 수성군을 훈련시키고
화약을 보충했다.

게다가 이 타이밍에 이순신이 바다에서 학살을 버리자
잠시 진주성을 둘러싼 압박이 풀린다.
역시 버서커 김시민은 그 사이를 못참고 일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거창으로 가서 또 일본군을 조져버린다ㅋㅋㅋㅋ

그러나 경상도의 병력을 최대한 끌어모았음에도
진주성의 총 병력은 3800명 정도 였다.
그래서 김시민은 같이 싸웠던 경상 의병장 곽재우와
전라 의병장 최경회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동시에 빤스런할 궁리만 하는 부하 장수와 군민들을 모아서
싸우자고 호소한다.

1592년 음력 10월 4일
진주성 앞으로 일본군 선발대 1만명이 도착한다.
일본군 선발대는 외곽에 있던 경상 우병사 이숭인의 부대를 격파해버린다.
당연히 성 안 조선군의 사기는 매우 떨어졌다.
그러나....

의외로 심리전의 대가 였던 곽재우
성 밖에서 유격전을 수행하던 곽재우는
비봉산에 대놓고 올라가서 횃불을 들고 나팔과 북을 울리게 했다.
일본군과 조선군이 모두 그곳을 보자, 아예 포까지 쏴버리면서
일본군을 혼란스럽게 했고
동시에 1만 구원군과 곽재우가 적을 죽이러 간다!!!!
라고 외쳐 한번에 사기를 올려버린다.

대충 일본군에게 곽재우는 이런 이미지
실제로도 잘싸우고 유능하기도 했지만
곽재우는 매우 교묘하고 심리전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의병 활동을 하며 트레이드 마크인 붉은 옷을 입고
상당한 심리전을 걸었기에
당시 일본군 입장에서 곽재우의 명성과 두려움은 꽤 컸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지들이 숫자가 많음에도 곽재우에게 공격 당할까 걍 가만히 있었고
전라도 의병들이 딱히 공격 없이 곽재우와 합류했을 정도

10월 6일
드디어 호소카와가 이끄는 본대가 도착했다.
아무리 진주성이 견고한 성이라고 하지만
아군측은 3800명 / 적은 30000명으로
10배 차이가 나는 상황
게다가 호소카와가 이끄는 본대는 전국 시대 때 공성전의 베테랑 그자체였다

근데 또 곽재우는 대담하게 일본군 배후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며 피리를 부는 등 심리전을 건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곽재우 부대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몰랐기에
공격도 못하고, 그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그것 때문에 나중에 있을 진주성 전투에서도
모든 병력이 아닌 일부 병력을 곽재우 대비의 예비대로 빼놨을 정도

아무튼 일단 도착은 했으니 일본군은 진주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일본군은 조총을 쏘며 조선군의 모랄빵을 유도했는데
오히려 조선군은 대포로 응답해준다.
공방전은 해가 지고도 계속되었는데
여기서 또 곽재우가 일본군 배후에서 횃불 이니쉬를 기가막히게 걸었고
결국 일본군은 일단 퇴각하게 된다.

다음 날에도 일본군은 하루종일 공격했지만
김시민은 매우 잘 대응해서 수확이 없었다.
게다가 곽재우의 심리전을 보고 감명을 받았던지
김시민은 아예 성문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퉁소까지 부는 등
일본군 입장에서 열불터지는 장면까지 연출해 준다

8일 아침
호소카와는 대대적인 진주성 공격을 명령한다.
진짜 이 때는 진주성이 함락 직전까지 갔는데
그 이유는 보급품, 특히 화살이 떨어져서
김시민은 왜군이 가까이 오면 화살 대신 돌을 던지라고 명령할 정도

ㅎㅇ 나 또 옴ㅋ
이 상황을 지켜본 곽재우는 아예 일본군을 유인해서
진주성의 압박을 풀기 위해
아예 남강 건너편에서 횃불을 들고 일본군을 조롱하는 동시에
성내 조선군을 응원한다.

이 X발럼아, 너 거기 딱 기다리고 있어라
9일
그러자 호소카와는 진주성 근처의 분산된 지원부대가 상당하다고 판단했고
호소카와는 다수의 소부대를 편성하고 진주성 외곽의 의병들을 공격한다.
다만 이는 철저하게 곽재우가 의도한 것으로
이는 병력 분산으로 인한 전력 약화로
실제로 일본군은 의병장 김준민의 매복에 걸려 상당한 손실까지 입는다

일본에서 그린 진주성 전투화
10일
이러다가 죽도밥도 안된다고 판단한 호소카와는
마지막 총공세를 명령한다.
전국시대로 인해 잔뼈가 굵은 베테랑 병사들이
일제히 진주성으로 돌격했다.
게다가 일본군은 일선 지휘관들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돌격했고, 외벽이 일시 점령되는 등 위기를 겪는다

내성마저 뚫리려던 순간 김시민은 장창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선다.
일본군은 엄청난 희생에도 끝까지 성을 점령하고자 싸웠고
조선군도 물러서면 떼죽음이기에 피칠갑을 하고 일본군을 막는다.
일본군도 이 때의 전투를
조선과의 전투에서 가장 처절하고 참혹한 전투라고 기록할 정도로
무려 4명의 일본군 지휘관이 이 돌격에서 사망한다

싸움은 밤새도록 지속되었고
11일 새벽
드디어 임진왜란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정예 육군병력이
조선군에게 단병접전으로 패배하여 후퇴한다.
김시민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그 성격답게, 한놈의 왜놈이라도 쳐죽이기 위해 추격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시체더미에 숨어있던 일본군의 총탄을 맞았고
김시민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며칠 뒤에 사망한다
지휘관이 부상을 입었기에 조선군은 추격을 단념했고
10월 11시 10시, 일본군 입장에서 가장 지옥도였던 진주성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행주 대첩이나 한산도 대첩에 비하면 대중적인 인지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에서 전쟁의 판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투이다
만약 진주성이 뚫렸다면 전라도로 가는 직행 루트가 열려버리고
이는 해상에만 집중하던 조선 수군과 이순신마저 위험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지휘관 급만 300명, 병사 10000명이 전사할 정도로
매우 큰 피해를 입었고
이 전투 하나 만으로 일본군의 기세를 완전히 꺽어버리고
사실상 임진왜란을 조선의 승리로 기울게 한 대단히 중요한 전투이다.

게다가 10배가 넘는 병력 차이
질적으로도 차이가 매우 큰데도 이겨버렸는데
전투의 전략적 중요성과 적군의 질, 사상자 숫자에서
진주성 전투는 오히려 한산, 행주 대첩보다 더 큰 의의와 결과물을 보여줬다.
또한 결과적으로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보전해서 의병활동과
이순신의 수군 전력을 유지시킨 매우 중요한 전투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극대노하며
진주성을 조져버리고 김시민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령할 정도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든 일본군 장수들은
진주성과 김시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고
결국 1593년 일본군은 전라도 진출을 아예 포기해버리고
오로지 진주성 하나만을 조지기 위해 무려 1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는데
이는 수군과 예비대까지 다 합칠 정도로, 일본의 복수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근데 여기서도 6000명의 조선군이 10일 동안 일본군을 끈덕지게 막아내서
결국 함락은 되었지만 일본군은 여기서도 대단히 큰 피해를 본다,

전국시대에도 이런 유래없는 피해와 전투를 겪은 일본은
진주 목사에 대한 원한과 두려움에 휩싸이고, 이는 모쿠소 호간이라는 전설로 일본에 전해지게 된다
에도시대에 모쿠소 호간이라는 괴물이 일본군을 공격하고, 최후를 맞은 모쿠소의 아들
지라이야가 아버지 김시민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일본에 침입한다는 연극이 유행할 정도였는데
여기서 모쿠소는 목사, 즉 진주목사였던 김시민을 말하는 것이다.

충무공 김시민
(忠武公 金時敏)
김시민이 지킨 전라도는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조선의 보급을 책임졌고
결국 승리로 가는 길을 열게 된다
전후 김시민은 선조에 의해 선무공신 2등에 제수되고, 충무공 시호를 받는다
참고로 원균 따위가 선무공신 1등이었다....

곽재우도 임진왜란 내내 네임드 의병장으로서
일본군을 지독하게 괴롭혔고
나중에는 아예 경상 좌병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성격이 매우 괄괄하며, 불의를 참지 못하던 성격이라
졸렬한 선조의 눈 밖에 났다.
결국 1617년,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세상을 풍미한 의병장은
공신직도 못받고 가난하게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