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황소>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
하지만 그는 엄청난 사랑꾼이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 아내를 사랑한 이중섭
스물 다섯, 이중섭은 분카가쿠인(3년제의 전문학교 과정)의 유화과를 졸업하고 연구생 신분으로 학교에 남아
2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 일제강점기었기에, 식민지국 신분의 본인과 식민지 종주국 신분의 아내를 맞는다는 건 힘이 들었다.
그러나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을 하게 된다.
발을 치료하는 남자 1941. 6. 4.
이중섭은 연애시절에 그림으로 엽서를 보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 중 하나인 발을 치료해주는 남자는 이중섭과 마사코가 산책 중 보도블럭에 신발 뒤축이 끼여 피가 나자,
이중섭이 그를 살펴보는 장면을 그려 넣은 것이다. 손에 피가 묻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보는 장면에서 사랑을 가늠할 수 있다.
결혼하게 된 이중섭과 마사코
이 맘 즈음, 독립하게 된 우리나라와 전쟁을 막 시작하게 된 일본의 상황으로, 마사코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와 살게 된다.
이때 마사코는 이남덕이라 이름을 갖게 되는데, 이름의 뜻은 남남북녀가 아니라 남녀북남에서의 남,
덕은 더덕더덕 아들, 딸 낳고 잘 살아서 한오백년 뒤엔 대향남덕국을 만들자하여 덕이라 붙였다. (대향은 이중섭의 호이다.)
그렇게 잘 사나 싶었는데..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피란길에 들어서게 된다.
피란민 분산정책에 따라 제주도로 보내진 가족은 턱 없이 부족한 피란민 식량배급과 게와 조개 등을 채취해 먹어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리고 1952년, 마사코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재산상속문제 때문에 마사코(이만덕)은 일본으로 아이들과 함께 떠나게 된다.
이중섭은 후에 그들에게 가겠다며 열심히 그림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2. 편지로 달래는 맘
이후 이중섭은 편지로 아내와 소통하게 된다.
… 나중에 만나 그대에게 보답으로… 별들도 눈을 꼭 감고 숨 죽일 만큼 길고 깊게 키스해 줄게요. 지금 내가 그대를 얼마나 깊이 뜨겁게
사랑하는지, 어떻게 내 마음을 그대에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소 … 나의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선생님, 제발 좀 가르쳐주세요.
1953년 3월 말경
어느 날은 서운해하기도 하다가
이 대향이 몇 번이나 사흘에 한번은 편지 보내달라고 부탁했는데 왜 이런저런 이유만 늘어놓으시오 … 남덕 씨만 생활이 어렵다고
생각하는가요? 모든 사람에게는 다 똑같은 고통이 있는 거외다.
1953년 5월 15일
어느 날에는 서운해한 자신에 대한 속을 터놓기도 한다.
내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글을 보내더라도 널리 이해해줘요. 오로지 그대만을 뜨겁게 사랑하기에 그대에게만 심한 요구를 하는 것이라오.
… 대향은 지금 오로지 사랑스러운 그대의 즐거운 편지와 빨리 그대 곁으로 가는 것만 생각한다오. 나는 그대들을 내 모든 것을 던져
사랑하고 또 사랑하오 …
1953년 5월 22일
이렇게 이후에 계속 편지로 아내와 소통하며 본인의 작품을 만드는 데 몰두한다. 이듬해 초까지 150점 가량의 그림을 그리는데,
이 그림에 <달과 까마귀>, <떠받으려는 소>, <흰 소>, <부부> 등이 탄생한다.
떠받으려는 소
3. 자식을 사랑한 이중섭
당신한테 쓰는 편지도 참 못 쓰는 편인데 아이들에게 쓰는 건… 도무지 잘 되지 않아요.
어떻게 써야 아이들이 기뻐할지 생각해본다오.
용기를 주고 싶고 기쁨도 주고 싶소.
1953년 6월 15일
이중섭은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의 그림에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는데,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태성 군
그 후로도 건강하지?
아빠가 보낸 그림을 보고…
“아빠는 다정해서 정말 좋아”라고 엄마한테 얘기했다고?
아빠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
더욱 더 재밌는 그림을 그려 보내줄게
아빠 중섭
태현 군, 태성 군
건강히 잘 지내고 있지?
아빠는 오늘 종이가 떨어져서 한 장만 그려 보낸다.
태성, 태현 둘이서 사이좋게 보렴.
다음에는 재미있는 그림을 한 장 씩 그려서
편지와 함께 보내줄게.
태현 군, 태성군.
둘이서 사이좋게 기다려다오.
아빠가 가서 자전거 사줄게.
아빠 ㅈㅜㅇㅅㅓㅂ
4. 이중섭의 말년
그렇게 이중섭은 열심히 작품활동에 몰두하다, 1955년 1월 18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게 된다.
몇몇 평자들에게는 시대착오적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나름 성황리에 진행이 된다.
하지만 전시가 끝난 후 그림 값을 제대로 못 받거나, 마음의 울화를 술로 마시며 몸이 쇠약해졌고, 그 이후로 가족에게 쓰던 편지도 그만 쓰게 되고, 후에 그림도 절필하게 되며
전시회를 성공해 하루 빨리 가족에게 돌아가려고 했던 그의 꿈은 좌절된다.
돌아오지 않는 강, 1956
이중섭의 절필작이라고 알려진 ‘돌아오지 않는 강’은 이중섭이 동명의 미국영화를 보고 온 후,
이름이 좋다며 되뇌이다 신문에 실린 영화 광고를 잘라 벽에 붙여놓고 웃기도 하고, 그 아래에 아내가 보내준 편지를
잔뜩 붙여놓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강을 제목 삼아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창 밖에 새를 그리기도 하고 인물을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꼭 선물해줘야겠다던 자전거는
시인 구상의 가족, 1955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구상의 아들에게 선물해준다.
오른쪽의 수염난 사람이 본인을 그린 것이다.
자전거를 받고 기뻐하는 가족들 사이에 껴있지 못하는 모습으로, 이중섭만 떼고, 가족만 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 후, 이중섭은 신경쇠약과 영양결핍으로 여러 곳을 전전하며 요양하다, 어느 날부터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고,
누구 하나 돌봐주는 이 없이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정신이 온전치 않을 때는 “난 그림을 그리려고 한 게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남덕과 아이들이 보고싶을 뿐이라고!”라며 푸념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에서야 천문학적인 가격을 매기는 작품의 주인이지만, 본래 현실은 슬프고 애닯은 인생을 산 이중섭.
그러나 그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것은 변함 없을 것이다.
참조
이중섭의 사랑, 가족 / 최석태, 최혜경
이중섭 편지 / 양억관
그림향기 / 정우철 도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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