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9일, 결혼기념일 제 1주년.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전날 밤에 싸둔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부속 수학 연구소인 필즈 연구소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학회의 이름은 캐나다 정수론 학회(Canadian Number Theory Association). 2년에 한번 열리는 학회로, 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학회입니다.
저는 시카고에 살고 있습니다만, 다행히도 시카고에서 토론토까지는 멀지 않았습니다. 비행기로 2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죠. 하지만 쌀쌀한 공기, 영어와 불어로 가득한 안내문들을 보니 캐나다에 왔음이 실감났습니다.
캐나다는 수학 실력이 뛰어난 나라입니다. 필즈상을 제창한 존 찰스 필즈는 말할 것도 없고, 수학자라면 누구나 아는 랭글랜즈 프로그램을 제안한 로버트 랭글랜즈 역시 캐나다인이죠. 2014년 필즈상 수상자인 만줄 바르가바 역시 미국-캐나다 복수 국적자이고, 많은 대학교에서 사용하는 미적분 교과서의 저자 제임스 스튜어트도 캐나다인입니다.
국제 수학 연맹은 각 회원국의 수학 연구 투자, 배출한 석박사 및 논문 수, 수학 연구의 활성화 정도에 따라 각 국가의 수학 능력에 등급을 매깁니다. 역량과 기여가 낮은 국가는 그룹 1에, 높은 국가는 그룹 5에 배정되지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하지요. 상위 그룹 국가는 하위 그룹 국가에 비해 더 많은 연회비와 책임을 지지만, 그만큼 국제 수학 연맹에서 더 큰 발언권을 가집니다. 캐나다는 그룹 5 국가 중 하나지요.
총 82개의 회원국 중 그룹 5에 속한 국가는 12개 뿐입니다. 한국은 2022년 2월에 그룹 5 국가로 승격했지요. 그래서 수학자들 사이에서 '설마 이번에 한국계 혹은 한국인 필즈상 수상자 나오나?'하는 기대감이 돌았고, 실제로 그 해 7월 한국계 미국인 수학자 허준이 교수님이 수상했습니다. 그룹 5에 속한 국가를 나열하자면, 브라질, 캐나다, 중국,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 이탈리아, 일본, 한국, 러시아, 영국, 미국이 있습니다.
잠깐 삼천포(3004)로 빠졌군요. 각설하고 지난 6년의 박사과정 동안 약 10개의 학회에 참석했지만 이번 학회는 두 가지 이유에서 특별했습니다. 하나는, 처음으로 미국 밖에서 열리는 학회를 참석했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으로 모든 경비를 내돈내산 했단 점이었지요.
대개 학회를 참석하는데 펀딩을 받는 경로는 두 가지입니다. 학회를 주관하는 단체에서 받거나 소속된 대학에서 받거나. 전자의 경우는 펀딩의 양이 제한되어있어 받기가 어려운 편입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소속한 학교측의 펀딩에 힘입어 학회를 참석하지요.
저는 일리노이 대학교 시카고 캠퍼스(UIC)에서 박사과정을 합니다. 아니, 했습니다라는 표현이 정확하겠군요. 4월에 박사 과정의 최종 관문인 디펜스를 마쳤거든요. 여름 학기 졸업이기 때문에 행정적으로는 여전히 UIC에 소속되어 있지만, 학교측에서 아무런 펀딩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덕분에 등록비, 숙소, 비행기, 식사 모두 제 돈으로 해결했지요.
다행히 토론토 대학교 학생 기숙사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숙박할 수 있었습니다. 이불도 없는 낡은 침대 하나랑, 수건 하나, 그리고 작은 책상 하나가 전부였습니다만 와이파이가 있고 책상이 있다면 수학 논문을 찾아 읽어보기엔 더없이 충분한 조건이지요.
3066호실에 배정되었습니다. 이런, 3066은 소수가 아니군요. N이라는 숫자가 소수일 확률은 통계적으로 1/ln N입니다. 통계적 확률로 3066이 소수일 확률은 약 12.46%입니다. 물론 큰 확률은 아닙니다만, 왠지 아쉽더군요. (가짜광기)
임의의 자연수 N의 소인수의 개수는 약 ln ln N개입니다. 이 공식에 따르면 3066의 소인수의 개수는 2.08개로 예상이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2, 3, 7, 73으로 4개나 있었습니다. 평균보다 훨씬 더 웃도는 소인수의 개수를 가진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진짜광기) 그렇게 저는 3066호실에서 첫번째 밤을 보냈습니다.
이튿날이 밝았습니다. 학회는 9시에 시작이었지만, 미리 가서 사람들과 인사나 할겸 30분 일찍 나섰습니다. 학회장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표를 찾아 목에 거는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이름표에 이름과 소속 학교만이 적혀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직함이 없습니다. 교수든 대학원생이든 학부생이든, 오로지 이름만 적혀 있습니다.
수학자들은 서로 알아갈 때 무엇을 물어볼까요? 이 세 문장이면 됩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어느 학교에 계신가요? 무엇을 연구 하시나요?”
연구 주제가 안 겹친다? 전혀 모르는 분야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면 됩니다.
"호오 그것 참 흥미롭군요."
수학자들 사이에서 "흥미롭다"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풀어 쓸 수 있습니다.
"당신의 연구 주제는 제가 한번도 고민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분야에도 나의 분야만큼이나 큰 의미, 깊은 역사, 놀라운 사실들이 가득하리라 믿습니다."
연구 주제가 겹친다? 그러면 바로 자기 연구 주제를 소개하고, 연구 얘기를 시작하면 됩니다. 수학자에게 연구 얘기는 참새에게 방앗간과 같습니다. "아 이건 못참지ㅋㅋㅋ" 하면서 이름 소개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끼어듭니다.
예전에 그런 농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향적인 수학자는 발표할 때 자기 발끝만 본다. 외향적인 수학자는 발표할 때 상대방 발끝도 본다." 하지만 실제로 수학자들이 발동걸려 대화하는 걸 보면 E도 그런 대문자 E가 없습니다. 궤도님 표정의 수학자들이 "수학이야? 나도 끼어야지! 다들 모여!" 하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이름표를 챙기고 수학 수다 한 푸닥거리 하고보면 학회가 시작할 시간이 됩니다. 도대체 학회는 무엇일까요. 각국의 수학자들이 한 공간에 음침하게 모이면 과연 무엇을 할까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수학자들의 수군수군, 과연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 비밀을 공개합니다.
9:00~10:00 강의 1
10:00~10:30 커피타임 1
10:30~12:00 강의 2, 3
12:00~2:00 점심
2:00~3:00 강의 4
3:00~3:30 커피타임 2
3:30~5:00 강의 5, 6
보다시피 8시간 중 2시간의 점심 시간과 1시간의 커피 시간을 제외하면 강의만 주구장창 듣습니다.
커피타임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볼까요. 앞서 말했듯 저는 약 10번의 학회를 참석했는데, 2번의 커피타임을 보장하지 않는 학회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수학자들에게 커피타임은 정말 중요한 전통이랍니다. 오죽하면 수학자 알프레드 레니는 "수학자는 커피를 정리로 만드는 기계다"라고 말했겠어요. (종종 더 유명한 에르되시의 말로 오인용되곤 합니다.) 원문은 독일어인데, 커피 잔여물과 정리가 동음이의어(satz)라는 점에서 만들어진 언어유희입니다.
학회 둘째날부터는 스케쥴에 리벤보임 상 시상식이 추가됐습니다. 리벤보임상은 정수론 분야에 업적을 남긴 수학자에게 수여되는 상입니다. 필즈상처럼 나이 제한은 없지만, 상을 받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수상자는 캐나다 국적자이거나 캐나다와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캐나다와의 관련이란, 대학원을 캐나다에서 다녔다던지, 캐나다에서 교수를 한다던지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은지 12년이 넘어가선 안됩니다.
리벤보임 상은 캐나다 정수론 학회 중에 수여되기 때문에 2년에 한번 시상합니다. 하지만 지난 2회간 코로나 때문에 시상식을 할 수가 없었다는군요. 그래서 올해 2020년, 2022년, 2024년, 총 3번의 시상식을 한 번에 다 치렀습니다. 2020년 수상자로는 캐서린 스테인지 교수가, 2022년 수상자로는 디미트리 코콜로폴로스 교수가, 2024년 수상자로는 헥토르 파스텐 교수가 수상했습니다.
수학상 시상식은 재밌는 전통이 있습니다. 바로 수상자가 강연을 한다는 점이지요. 수상자는 1시간에 걸쳐, 자신의 연구 역사 및 결과를 소개하고 앞으로 무슨 연구를 할 것인지를 소개합니다.
수상자들의 강연을 들으면 참 오묘한 기분이 듭니다. 정수론이라는 분야 아래 저렇게 다양한 연구 주제와 관심사가 있다는 점에서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전혀 생각치도 못한 지점에서 저의 연구 주제와 겹친다는 점에서 놀라게 됩니다. 무한히 방사하여 뻗어나갈 것만 같은 수학의 가지들의 우연한 연결은 영감을 넘어 경외감을 선물합니다. 이 우연한 연결은 무엇일까, 이 우연의 기저에 깔려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수학은 참 아름다운 학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강연과 커피타임 끝에 저녁이 되면, 몇몇 마음이 맞는 수학자들은 맥주를 마시러 갑니다. 하지만 저 같은 아싸는 저녁만 먹고 돌아옵니다. 숙소에 돌아와, 오늘 들은 수학 강연에 관련된 논문을 찾아보거나, 아니면 떠오르는 연구 아이디어를 정리하곤 합니다...만 집중은 30분도 채 가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주구장창 수학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더 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강연과 커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면 어느덧 학회 마지막 날이 다가옵니다. 집에 가는 길엔 왠지 그런 기분이 듭니다. 집에 가서 더 열심히 연구해야지. 당장 이 논문 저 논문부터 읽어봐야지. 하지만 대개 그런 열정은 일주일을 채 못 넘기더군요 흐흐흐.
사실 학회 마지막 날은 내일이지만, 아마 짐 싸고 공항 가고 비행기 타면 바쁠 것 같군요. 아마 내일도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아, 하루 일찍 학회 후기를 작성해봤습니다. 8월달에 참석할 또 다른 학회를 기대하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침대와 책상이 전부인 3066호실

셋째날 저녁. 치킨에 쭈펄재판 못 참지

이름과 소속만이 전부인 학회 이름표.

대강의실. 벽은 펜로즈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대강의실 전면부. 칠판 6개를 오가는 판서

나선형 계단이 인상적인 필즈 연구소 내부


학회에서 제공한 저녁. (하루만)

누나가 사준 박사 졸업 기념 티샤쓰. 쪽팔려서 잠옷으로만 입었다.

필즈 연구소 명물, 필즈 기념 머그컵. 빨간색 사진을 찍었지만, 초록색으로 구매했다.

공짜 나눔 책들이지만, 수학책이 아니라서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모양.



위에서부터 차례로 2020년, 2022년, 2024년 리벤보임 상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