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미술에 대한 조예가 얕기 때문에 부정확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술적 관점 보다는 생애 위주로 작성했습니다.
이말년 시절부터 개방장을 사랑해온 개청자들이라면 이 그림을 한 번쯤을 보았을 것입니다.
제임스 앙소르 - 악령에 둘러싸인 예술가(1898)
이 그림을 처음 봤을때 사람들은 뭐야 이 그림 이말년 그림 아님? 이라는 반응이었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개방장 만화처럼 배경이 없고 심플한 느낌이 좋았던 저는 이 ‘제임스 앙소르’ 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한 동안 그의 작품과 생애를 탐미했습니다.
침착맨오늘의 주인공 제임스 앙소르. 어느 순간부터 털보 미남하면 침착맨이 생각난다
[초기] 하남자 특) 남들이 시키는대로 함
그는 스무살 까지 벨기에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다녔다고 합니다.
위키를 찾아보면 렘브란트, 루벤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실제로 다음과 같은 그의 초기 작품을 보면 우리가 흔히 스테레오타입으로 생각하는 근대 미술작품 느낌이 납니다(미술관에서 오 잘그렸네 스윽 하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
굴 먹는 사람, 노 젓는 사람, 뒤집은 코를 한 여인
이렇게 당대의 정석적인 그림을 그리던 그가 갑자기 왜 이말년이 됐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그의 청년시절은 날카롭고, 냉소적이고 시니컬한 면모가 있었다고 합니다. 훗날 나이가 들면서 유해졌다고 하지만 당시의 그는 삼국지 위연마냥 ‘반골’의 기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단 어릴때부터 미술을 해서 미술학교에 가긴 했고 시키는대로 정통적인 미술관에 입각해서 그림을 그리곤 했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언젠가 내가 촉나라 목 딴다’ 생각이 가득했던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항상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결국 근시안적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떠났습니다.
이런 기질을 갖고 있던 그는 도제적 교육에 싫증이 나 있는 상태였고 마침 시기적절하게 당시 산업혁명과 더불어 미술계에서도 후기인상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 등 기존 미술에 반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나오고 있던 터라 그 역시도 제약과 규제를 타파하고 참신함을 추구한다는 목적하에 설립된 20인회(Les Vingt) 라는 그룹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제갈량 만난 유비, 삼국지 만난 개방장, 옾카페 만난 전무님 처럼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흑화] - 표현주의는 이게 일상이야
20인회(Les Vingt) 에 들어간 그는 희망과 설렘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보수주의를 타파하고 음악, 문학, 예술적 교류를 하며 미술적 발전을 도모한다는 이 단체는 실제로 침투부 초대석처럼 모네, 쇠라, 고갱, 고흐 등 저명한 인사들을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신이 잔뜩 난 그는 자신의 반골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할 생각에 1884년 자신의 첫 20인회 전시회에서 6점의 작품을 전시했고 그는 ‘역대급 천재 화가의 등장’ ‘젠장 또 앙소르야 그를 숭배해야해’ 찬사를 들으며 GOAT 반열에 올…랐으면 좋았겠지만 오히려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에 분노했고 ‘이게 그림이냐? 쓰레기같다.’ ‘역겨운 X끼 꺼져라’ 등 혹평도 그런 혹평이 없겠다 싶은 평가를 들으며 갤주에 등극하게 됩니다.
참고로 그의 당시 그림들을 보자면 이렇습니다.
확실히 초기 그의 작품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훗날 19세기 이말년 소리를 듣게되는 그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던지 자신의 작품세계를 계속 고수하며 작품을 이어나갑니다.
‘저 X끼 역시 반골의 상이다 저딴 쓰레기 예술을 하는 놈은 사라져야 한다'
이런 소리를 첫 전시회 1884년부터 1889년까지 5년동안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작품활동을 이어나가던 제임스 앙소르에게도 우리 촉나라의 역모아이돌 위연 선생님마냥 사건 하나가 발생하게 됩니다.

삼국지 위연, 역시나 털보다
제약과 규제, 꽉 막힌 보수주의 타파를 지향한다는 20인회가 오히려 제임스 앙소르의 작품을 ‘너무 진보적이다’ 라는 이유로 평가 절하하고 규탄하는 이 상황에서 그래 니들이 나를 반골의 상이라고 싫어한다면 내가 꼭 그 X 같은 반역을 하고 말겠다는 위연처럼 1889년 앙소르는 작품 하나를 출품하게 됩니다.

하지말라면 더 하고 싶은 사람의 심리. 널 처음 봤을때 반골의 상이라고 싫어한다면 그 x같은 반역을 꼭 해줘라.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1889)
지난 5년간 모멸과 지탄을 받으며 더욱 냉소적이고 비인간적이게 된 그는 과거 현실적인 장면을 어둡게 그리던 것에서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밝은 색채로 그리는 스타일로 작품이 변화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으니 그는 결국 21세기 지금도 함부로 건드릴수 없는 나락가게 되는 주제 3대장중 하나인 ‘종교’ 를 건드리게 됩니다.
이 시기 그는 예수에 꽂혀있었는데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가면과 그로테스크함을 예수 와 결합시켜 바로 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실험적인 작품이 많이 등장하게 되는 시기라고 할 지라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용인되기 힘든 주제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그리스도를 조롱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욱이나 그리스도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유럽이었으니 충격이 더욱 크게 다가왔습니다.

역시나 그의 이런 그림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고 현대에도 매장되듯이 이 그림도 20인회에서 거절당했으며 무려 1929년까지 40년동안 전시되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제임스 앙소르는 20인회에서 퇴출당했습니다.
아니 그래도 이해가 안 간다. 저 그림 보면 조롱되고 희화화된 그리스도는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군중들만 그로테스크하게 표현됐는데? 뭐 저딴 거로 유난이냐 퇴출되고 추방까지 될 일인가? 갈릴레오 시대도 아니고 19세기 말인데?? 싶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약 150년 뒤 한국에서 이말년이라는 작가도 똑같진 않지만 비슷한 곤경에 처한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시대가 많이 변했기에 앙소르같이 퇴출당하거나 엄청난 지탄을 받진 않았지만 아래를 보시면 어느정도 당시의 분위기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ㅋㅋㅋ
[재평가의 시작] - 김말년의 만화를 보세요. 요즘 인기 있지요
퇴출탕한 그는 위연같이 토사구팽에 처하진 않았습니다. 존버가 승리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인생은 T 처럼 살 필요도 있다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포기하지 않았고 언젠가 자신의 작품이 빛을 발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개청자들이 뭐라고 해도 소신을 지키는 개방장의 자세가 침하하와 침투부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것처럼 그 역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했고 비평가들의 지탄, 20인회에서의 퇴출, 어그로꾼들과 불편러들의 억까를 이겨낸 그를 보며 신도 감동했는지 머지않아 그의 작품이 빛을 발하게 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바로 ‘표현주의’ 의 유행입니다.
미술사조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니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대표작 하나만 보여드리자면

표현주의 대표작 뭉크의 절규
바로 이 뭉크의 절규가 표현주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얼마나 더 상세하게 그리냐, 얼마나 더 똑같이 그리냐에서 벗어난 이러한 그림들은 전통적인 예술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이게 뭔 그림이냐 낙서도 아니고 애들 장난도 아니고’ 소리를 들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자연스럽게 처음에는 지탄을 받았던 앙소르의 작품들도 재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마치 귀귀 엉덩국 잉위 마냥 현대미술로 가는 과도기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의 꽃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뭉크와 더불어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후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점점 재평가가 이뤄져 20세기가 시작할 무렵에는 성공을 거둬 1901년에 벨기에 자유 아카데미 창립 회원, 1903년 레오폴드 훈장등 명성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당시의 부정적인 비평과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표현한 작품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악령에 둘러싸인 예술가, 즉 맨 위에서 보여드린 ‘이거 이말년 그림 아님?’ 의 바로 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20인회 시절 비평가들에게 둘러싸여 욕을 바가지로 먹던 자신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황혼기] - 일류 스트리머 침착맨, 삼류 만화가 이말년(?)
매슬로우의 욕구이론처럼 애정욕구와 인정욕구를 충족시켜 다음단계로 넘어간 그는 인정을 받자 화풍이 부드러워지고 특유의 분노와 그로테스크함도 희석되었습니다. 1929년 위에서 언급한 문제작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도 공개되고, 알베르 1세 국왕에게 남작 작위도 받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으면서 그는 사실상 반골기질도 사라지고 사람이 좀 유해진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통과 분노가 사라지니 창작과 영감의 원동력도 사라진 걸까요? 공포의 떡볶이 사태처럼 그의 황혼기에는 더 이상 이슈화 되는 작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피카소, 몬드리안, 칸딘스키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차지했습니다. 그 역시도 미술에 흥미가 좀 떨어졌는지 미술이 아니라 음악에 더 열중, 방문객들이 오면 하모니움을 연주해 사람들에게 재미를 선사하고 발레 무언극 작곡을 하는 등 스트리머적 면모를 더 보여주다가 만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이 그림 이말년 그림 아님?’ 의 주인공 제임스 앙소르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고수한 결과 어느정도 운도 따라주면서 인정도 받은 그를 생각하며 이말년 시리즈를 정주행 하면서 작품을 음미해보는 것은 어떨지 감히 제안해보는 바입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