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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맨
23.10.07
·
조회 38064

 

 "주인님! 돌아오셨군요!"

 

 삐삑-

 오랜만에 말리부 디젤의 차문을 열었다.

 그동안 외로웠는지 말리부 이 녀석이 주인을 반갑게 맞는다.

 

 제네시스를 사고 나서 아내의 손에 넘어간 나의 전 애마 2013년형 말리부 디젤.

 나의 첫 신차이자 든든했던 가족의 신행태보.

 부드러운 제네시스에 홀려 그동안 눈길조차 주지 않던 비운의 초호기.

 조홍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통솔력 79에 무력 81. 초반에 장수가 부족하면 감지덕지하면서 아껴쓰던 장수지만 점차 세력이 커져 천둥벼락같은 장수들이 영입되면 뒷전으로 밀려 뭐하고 사는지도 모르는 그런 녀석.

 

 오늘같이 소영이를 데리러 갈 때면 평소대로 부들부들 비단같은 주행감의 제네시스를 선택했을 터였다.

 하지만 상황이 급했다.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마침 아내의 가방에 말리부 차 키가 있었기에 부랴부랴 말리부를 택한 것이다.

 

 내 눈 앞에 서 있는 하얀 빛깔 말리부.

 오랜만이라 어색한 것도 잠시, 차문을 열자 그간 몸에 배어있던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조종석에 앉자마자 안전벨트 착용, 왼손으로는 조종석 위치 조정, 오른손으로 사이드 브레이크 해제, 시동을 걸고, 사이드 미러를 펴는 동시에 가속 패달을 밟으며 몸이 순간 뒤로 밀리는 걸 느낀다. 자연스럽게 주차장을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간다.

 

 익숙한 버튼 위치와 재질감.

 특유의 무뚝뚝한 계기판.

 나를 감싸는 디젤 특유의 콜록콜록 기침소리.

 가로등 LED에 물든 채 시내를 가르고 아스팔트로 빨려들어간다.

 마치 2013년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결혼 초기까지 나는 자차가 없었다.

 대중교통이 발달한 수도권에 살기도 했고 밖을 자주 나가는 직업이 아니다보니 필요성을 못 느껴 마련하지 않았던 것인데 소영이가 태어나면서 짐도 많아지고 안전하게 가야할 일이 생겨 구입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디젤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지 않았다.

 승합차와 SUV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디젤이 승용차에 하나둘씩 장착이 되면서 전면에 홍보를 하던 시기였다. '경제적이고 힘 좋은 승용차'에 홀려 사람들은 앞다투어 디젤 승용차를 구입하였다. 나 역시 '말리부 가솔린'과 '말리부 디젤'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결국 '네이버 자동차' 토크에서 비밀결사로 활동하고 있던 쉐슬람에게 홀려 '말리부 디젤'로 결정하고 말았다.

 비밀결사 쉐슬람 말에 의하면

 

 "쉐보레는 천하제일차(天下第一車)이며 안전, 디자인, 역사를 모두 충족시킨 트리니티 포스로 군림하고 있다. 그간 보령미션으로 인한 고질적인 심장병이 약간의 흠결로 잡혀있으나 이번 '말리부 디젤'의 출시로 디젤 특유의 힘찬 토크가 이마저도 덮어버리는 한석봉의 금물신필이 될 것이며, 마지막을 장식하는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 이로써 쉐보레는 마지막 퍼즐을 맞추어 용처럼 고고히 비상할 것이요, 전 자동차 시장을 호령하는 유일신으로 거듭날지니 아직 깨닫지 못한 우매한 자들은 미리 조아려 경배를 드리는 것이 옳다." 

 

 그들은 이것을 '네이버 자동차' 토크란에서 경전처럼 외고 있었다.

 차를 한 번이라도 몰아본 사람들은 이들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겠지만 아직 차를 안 사본 나의 입장에서 지속된 세뇌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고, 어느새 정신차려보니 내 손에는 말리부 디젤의 차량등록증이 들려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나 애지중지 타고 다녔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디젤 특유의 덜덜거림이 심해졌다.

 간사한 것은 인간이었다.

 눈에서 꿀물이 떨어질 것처럼 아껴주었던 시간을 뒤로 하고 시끄러워지자 냉대를 했다.

 연식이 된 디젤은 흡사 영감과 같았다.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갑자기 크게 호통을 치는가 하면, 차체가 흔들릴 정도로 요동치다가 멈추고는 곧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울컥하며 한 차례 통 위로 솟았다가 비비비 거리며 꿀벌 날개 비비는 소리를 내는 둥 날카로운 주파수같은 소리를 내는 둥 세상 신기한 소리는 다 만들어내고 다녔다.

 새로운 제네시스를 사자마자 헤어져버린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런 나를 태우고 말리부 디젤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처음엔 나쁘지 않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조금 주행을 하다보니 이게 웬걸, 제네시스보다 훨씬 반응이 빠른 것이다.

 디젤의 강한 저속 토크가 제네시스보다 반박자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인데, 말리부 디젤만 탈 때는 모르다가 제네시스를 경험해보고 나니 깊숙이 다가왔다.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기민한 움직임에 몰입하자 덜덜덜 떨리는 소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투박한 실내 인테리어도 오로지 차량 본연의 기능에 집중한 느낌마저 들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소영이를 만나 태우고 집에 돌아오는 동안 주행의 재미를 만끽했다.

 별 것 아닌 작은 부분이 큰 만족감이 되어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래, 나의 하얀 조홍, 백홍.

 그동안 너에게 소홀해서 미안했다. 앞으로 종종 너와 함께 하마.

 짧은 시간 나만의 사죄와 다짐.

 백홍도 나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더욱 우렁차게 엔진의 굉음을 낸다.

 어쩌면 오랜 기다림 속에서 나에게 서운했던 감정의 뭉치들을 도로에 한바탕 토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일종의 투정으로 변해 나를 다그치지만 그 속은 용서와 환영일 것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되뇌인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점차 하나가 되어간다.

 

 집으로 도착해 소영이를 내려주었더니 소영이 컨디션이 영 좋지 않다.

 디젤의 덜덜거림에 멀미가 난 것 같았다.

 식탁 앞에서 밥 맛이 떨어진 허연 입술을 파르르 떤다.

 그냥 제네시스 타야겠다.

 

 

댓글
피난민수
23.10.07
BEST
솔직히 심심하죠?
주펄놈
23.10.07
BEST
ㅋㅋㅋㅋ그 통천님인가 쏘맘님이 방장 운전하는 차 탔다가 토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차가 문제가 아닐 수도
일레인
23.10.07
BEST
혹시 하루키병 걸리셨나요?
이흥건
23.10.07
BEST
이말년씨리즈 글로 보는 느낌이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펄순이
23.10.07
BEST
나중에 글 싹 다 합쳐서 이말년 수필집 출간해 주세요
삐깨츢
23.10.09
유투브였으면 4~5시간 짜리 원본 속에서 퀘퀘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갔을 10분 남짓의 침소리. 이게 침소리의 정수를 오롯이 즐기는 방법이다 이말이야.
네스카페수프리모
23.10.09
이정도면 말리부랑 바깥살림 차리신 것 같은데요
킹애오
23.10.09
영상과 다른 형태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니...방장의 휴가..오히려 좋을지도...
침숭이수호자
23.10.09
난 항상 생각한다
이 아저씨가 글쓰는 내용에 제약 없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미쳐날뛸까...? 너무 기대된다...
내성임
23.10.09
진짜 미친사람(극찬) (팬이에요) 이야 방장은 ㅋㅋㅋ
아 침튜브 이말년시리즈 한편 뚝딱이네 미쳤다 미쳤어
배루키
23.10.10
글 맛이 너무 좋네요
경제침착
23.10.10
말리부는 이 글을 보고 서운해 할것입니다..
침착넨
23.10.11
비비비 거리는거 들어보고 싶닼ㅋ
심벌즈맨
23.10.11
요즘같이 너무 빠르게 휘발되는 세상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꾹꾹 눌러 쓴 글을 보니 너무나 반갑습니다.
훠니훤
23.10.11
1. 이말년에게는 이말년 수필이 있었다면, 침착맨에게는 침착맨 수필이 있다. 참고로 이말년 수필은 웹툰이며, 이 쪽은 진짜 수필이다.
2. 한 번에 쭉쭉 쓰는 지, 아니면 퇴고를 하는 지 궁금해진다.
3. 이런 글을 보고 있자면 나도 글쓰기 감성이 충만해지곤 한다. 우선 이번 수필을 보고서 나는 또 추리병이 도졌다. 추리병은 뭐든지 추리하고자 하는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말리부에 대한 추리를 적으려고 했는데, 적기 위해 머리 속을 정리하니, 이 추리는 폐기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는 글쎄...... 작가분들과의 합방이었던가? 창작 욕구의 배설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이말년이라는 웹툰작가로 활동할 만큼 침착맨님의 창작 욕구는 매우 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웹툰은 지금
훠니훤
23.10.11
그리고 있지 않지만, 트위치와 유튜브, 또 예전에는 간간히 있는 그림 외주등으로 창작 욕구를 해소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가 이루어 놓으신 게 아직 풍족하여 침착맨 유튜브는 현재를 달리고 있지만, 침착맨은 잠시 침대에 몸을 맡긴 상태이다. 그가 지금의 휴식상태에 아주 만족하고 있을 거라고 나는 지레짐작해보지만, 창작욕구라는 건, 다른 욕구와 마찬가지로 중단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침대에 편히 누워 있어도 창작 욕구의 샘물은 조금씩 차오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마음 한 켠에 있는 고맙다와 부담감이 융합되어, 이 게시판이 생기지 않았나라고 나 혼자 추리해본다.
아무튼 침착맨의 침착한 생각을 경험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핵버섯
23.10.12
이 차 타는 것을 말리부~
v비타민v
23.10.14
결국 쏘영이 멀미해서 제네시스 타기로한겤ㅋㅋㅋㅋㅋ웃기면서도 스윗하네요ㅋㅋㅋ
SagaMakers
23.10.14
이말년 수필집 출간 임박
아들래미대신
23.10.14
ㅋㅋㅋㅋㅋㅋ 아 배아파 ㅋㅋㅋㅋㅋ
귤리미
23.10.15
아 마지막문단 전까진 뭔가 감동말랑이었는데 마지막문단에서 너무킹받음 ㅋㅋㅋㅋㅋㅋ으아악
이병건식재료
23.10.15
새삼 글 진짜 맛있게 잘 쓴다 ㅋㅋ 너무 좋아
침착맨째고
23.10.15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ㅌㅌㅌㅌㅋㅋㅋㅋㅋㅋ제네시스가 최고잔슴~!
D침아메
23.10.15
추억은 추억일때 아름답습니다.
공손범
23.10.15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운다
gon2gon2
23.10.15
멀미전문가
젊면수심
23.10.15
https://resources.chimhaha.net/comment/1697343550373-edx081jb85j.jpg
있잖아요
23.10.15
차와 하나가 되다니 어허 이것 참.. 세상 말세로다.
무릇! 기계와 인간은 유별할진데
어찌 자동차와 하나가 된단 말인고..
천지가 개벽해서 기계와 인간이 하나되고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단 말인가… (쿨럭)
숭어조아
23.10.15
와 우리 오빠 말리부 타면 맨날 멀미 했는데 말리부 특(김기열아님)인가요?
미텼꽁
23.10.16
BEST
글도 잘 써
침덩덩엉
23.10.17
이 차 타는 걸 말리부
침덩효
23.10.17
귀엽다......
77H비말아조
23.10.18
이말년 수필집 기원합니다,,, 아 블로그 그 글 감성 그대로네 넘 조타 ㅋㅋㅋㅋㅋㅋㅋㅋ항상 허무하게 끝나는게 매력ㅋㅋㅋㅋㅋㅋ
물총쏴
23.10.20
진짜 너뮤 좋다 ㅎㅎ
생로병건
23.10.22
ㅋㅋㅋㅋ 너무 재밌네
상중하
23.10.22
이건 다시 봐도 재밌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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