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부
"주인님! 돌아오셨군요!"
삐삑-
오랜만에 말리부 디젤의 차문을 열었다.
그동안 외로웠는지 말리부 이 녀석이 주인을 반갑게 맞는다.
제네시스를 사고 나서 아내의 손에 넘어간 나의 전 애마 2013년형 말리부 디젤.
나의 첫 신차이자 든든했던 가족의 신행태보.
부드러운 제네시스에 홀려 그동안 눈길조차 주지 않던 비운의 초호기.
조홍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통솔력 79에 무력 81. 초반에 장수가 부족하면 감지덕지하면서 아껴쓰던 장수지만 점차 세력이 커져 천둥벼락같은 장수들이 영입되면 뒷전으로 밀려 뭐하고 사는지도 모르는 그런 녀석.
오늘같이 소영이를 데리러 갈 때면 평소대로 부들부들 비단같은 주행감의 제네시스를 선택했을 터였다.
하지만 상황이 급했다.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마침 아내의 가방에 말리부 차 키가 있었기에 부랴부랴 말리부를 택한 것이다.
내 눈 앞에 서 있는 하얀 빛깔 말리부.
오랜만이라 어색한 것도 잠시, 차문을 열자 그간 몸에 배어있던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조종석에 앉자마자 안전벨트 착용, 왼손으로는 조종석 위치 조정, 오른손으로 사이드 브레이크 해제, 시동을 걸고, 사이드 미러를 펴는 동시에 가속 패달을 밟으며 몸이 순간 뒤로 밀리는 걸 느낀다. 자연스럽게 주차장을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간다.
익숙한 버튼 위치와 재질감.
특유의 무뚝뚝한 계기판.
나를 감싸는 디젤 특유의 콜록콜록 기침소리.
가로등 LED에 물든 채 시내를 가르고 아스팔트로 빨려들어간다.
마치 2013년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결혼 초기까지 나는 자차가 없었다.
대중교통이 발달한 수도권에 살기도 했고 밖을 자주 나가는 직업이 아니다보니 필요성을 못 느껴 마련하지 않았던 것인데 소영이가 태어나면서 짐도 많아지고 안전하게 가야할 일이 생겨 구입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디젤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지 않았다.
승합차와 SUV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디젤이 승용차에 하나둘씩 장착이 되면서 전면에 홍보를 하던 시기였다. '경제적이고 힘 좋은 승용차'에 홀려 사람들은 앞다투어 디젤 승용차를 구입하였다. 나 역시 '말리부 가솔린'과 '말리부 디젤'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결국 '네이버 자동차' 토크에서 비밀결사로 활동하고 있던 쉐슬람에게 홀려 '말리부 디젤'로 결정하고 말았다.
비밀결사 쉐슬람 말에 의하면
"쉐보레는 천하제일차(天下第一車)이며 안전, 디자인, 역사를 모두 충족시킨 트리니티 포스로 군림하고 있다. 그간 보령미션으로 인한 고질적인 심장병이 약간의 흠결로 잡혀있으나 이번 '말리부 디젤'의 출시로 디젤 특유의 힘찬 토크가 이마저도 덮어버리는 한석봉의 금물신필이 될 것이며, 마지막을 장식하는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 이로써 쉐보레는 마지막 퍼즐을 맞추어 용처럼 고고히 비상할 것이요, 전 자동차 시장을 호령하는 유일신으로 거듭날지니 아직 깨닫지 못한 우매한 자들은 미리 조아려 경배를 드리는 것이 옳다."
그들은 이것을 '네이버 자동차' 토크란에서 경전처럼 외고 있었다.
차를 한 번이라도 몰아본 사람들은 이들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겠지만 아직 차를 안 사본 나의 입장에서 지속된 세뇌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고, 어느새 정신차려보니 내 손에는 말리부 디젤의 차량등록증이 들려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나 애지중지 타고 다녔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디젤 특유의 덜덜거림이 심해졌다.
간사한 것은 인간이었다.
눈에서 꿀물이 떨어질 것처럼 아껴주었던 시간을 뒤로 하고 시끄러워지자 냉대를 했다.
연식이 된 디젤은 흡사 영감과 같았다.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갑자기 크게 호통을 치는가 하면, 차체가 흔들릴 정도로 요동치다가 멈추고는 곧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울컥하며 한 차례 통 위로 솟았다가 비비비 거리며 꿀벌 날개 비비는 소리를 내는 둥 날카로운 주파수같은 소리를 내는 둥 세상 신기한 소리는 다 만들어내고 다녔다.
새로운 제네시스를 사자마자 헤어져버린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런 나를 태우고 말리부 디젤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처음엔 나쁘지 않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조금 주행을 하다보니 이게 웬걸, 제네시스보다 훨씬 반응이 빠른 것이다.
디젤의 강한 저속 토크가 제네시스보다 반박자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인데, 말리부 디젤만 탈 때는 모르다가 제네시스를 경험해보고 나니 깊숙이 다가왔다.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기민한 움직임에 몰입하자 덜덜덜 떨리는 소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투박한 실내 인테리어도 오로지 차량 본연의 기능에 집중한 느낌마저 들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소영이를 만나 태우고 집에 돌아오는 동안 주행의 재미를 만끽했다.
별 것 아닌 작은 부분이 큰 만족감이 되어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래, 나의 하얀 조홍, 백홍.
그동안 너에게 소홀해서 미안했다. 앞으로 종종 너와 함께 하마.
짧은 시간 나만의 사죄와 다짐.
백홍도 나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더욱 우렁차게 엔진의 굉음을 낸다.
어쩌면 오랜 기다림 속에서 나에게 서운했던 감정의 뭉치들을 도로에 한바탕 토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일종의 투정으로 변해 나를 다그치지만 그 속은 용서와 환영일 것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되뇌인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점차 하나가 되어간다.
집으로 도착해 소영이를 내려주었더니 소영이 컨디션이 영 좋지 않다.
디젤의 덜덜거림에 멀미가 난 것 같았다.
식탁 앞에서 밥 맛이 떨어진 허연 입술을 파르르 떤다.
그냥 제네시스 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