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디쉬

나에게 학창시절 했던 고전게임은 볼 때마다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게 하지만, '브랜디쉬'라는 게임은 특히나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일단 게임 전면에 나선 '도라 도론' 일러스트가 매혹적이었고, 당시 '팔콤'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이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당시 '팔콤'은 부드러우면서 날카로운 도트 그래픽을 선진적으로 구현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학창시절 게임잡지에서 '브랜디쉬' 지면광고를 볼 때마다 설레곤 했다. 참고로 지금이야 광고가 나오면 귀찮지만 그 시절 게임잡지 지면광고는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좋아'였다. 새로 나온 게임 구경하기가 좋았고 광고인지라 해당 게임의 멋있는 부분만 범벅을 해 놓기 때문에 사실상 보기만 해도 배불렀다.
못만든 영화는 티저가 더 재밌다는 말도 있잖은가. 게임잡지 지면광고도 딱 그랬다. 행복 가스를 마신 것 처럼 게임잡지 지면광고 구간은 모두가 신나고 행복하고 열정적이고 정의롭고 명석하고 의리있고 감성적이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그때의 내가 게임잡지를 광고부터 보고 또 보고 했던 이유였던 것 같다. 중학생이었기 때문에 외로웠고 감수성이 예민했다. 혼자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고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만화와 게임은 그만큼 부족한 나에게 없는 환상의 세계였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비리비리한 중삐리 침착맨은 그러던 어느날 머릿속에 막연히 기대하던 '브랜디쉬'를 어렵게 구할 수 있었다.
게임잡지만 보면서 군침을 흘리던 과거는 이제 그만. 드디어 컴퓨터에 깔고 개처럼 즐기기만 하면 됐다.
설치중, 설치 완료, 프로그램 실행, 고막을 찌르는 사운드 블라스터의 오프닝 음악, 그리고 화려하게 화면 정중앙에 박히는 로고.
이제 간다!
1시간만에 찍 쌌다.
그것도 10분만에 때려치고 싶었는데 미련 때문에 50분 더 부여잡은 것이다.
개같은 게임이었다.

시점이 주인공 1인칭 고정인데 화면을 돌리면 세상이 돌아간다. 요즘 FPS 게임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랑은 다르다. 이 당시 기술력으로는 실시간 화면전환이 되지 않기 때문에 화면을 돌리면 90도 칼각으로 세상만물이 휙휙 변해버리는 것이다. 한 번 화면을 돌릴 때에는 괜찮은데 10번 정도 넘어가기 시작하니까 시신경이 파괴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당시 시력이 2.0이었으니까 받은 데미지는 더욱 컸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청력이 좋으면 음공에 더욱 취약하듯이.
게다가 무기 내구도라는 신통방통 죽통 때리고 싶은 시스템이 있었다. 요즘에야 무기 내구도라는 개념이 있어서 이해가 안가겠지만 '브랜디쉬'의 무기 내구도 시스템은 요즘의 것과는 궤를 달리 한다. 예를 들어 장검 내구도가 20이면 한 번 휘두를 때마다 1씩 닳아 없어진다. 그 말은 20번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소인배가 만들었는지 나오는 무기들의 내구도가 10, 15 이런 식으로 더럽게 짜게 나왔다. 빡빡한 무기 내구도만큼 쓸 때마다 간장이 빡빡하게 경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칼을 여러 자루 가지고 다니면 될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굉장히 협소한 인벤토리 용적 때문에 여분의 칼을 더 챙기면 물약을 그만큼 못가지고 다닌다. 열쇠를 가지고 다닐 것이냐 물약을 가지고 다닐 것이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상황도 생긴다. 가지고 가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용적이 부족하니 앞날에 어떻게 될지 예측해서 아이템을 추리고 추려야만 한다. 시신경, 간장에 이어 뇌세포가 연쇄파괴 되는 느낌을 받는다. 고추가 저려온다.
여기까지가 아쉬워서, 참고 하다보면 깊은 팔콤의 깊은 낫토 향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3회, 4회씩 재도전해서 알아낸 브랜디쉬의 감상이다. 해볼수록 느껴지는 건 낫토가 아닌 구토.
10년 후에야 이 '브랜디쉬'라는 게임이 이 특유의 시스템으로 단단한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90도로 휙휙 돌아가는 1인칭 시점은 화면을 돌릴 때마다 급변하는 맵의 성질을 이용해 퍼즐요소로 즐길 수 있게끔 했다는 걸 알았다. 무기 내구도 시스템은 극한의 상황일 때 짜내는 재미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주인공이 때릴 때마다 힘이 올라가고 맞을 때마다 체력이 올라가고 마법을 쓸 때마다 지능이 올라가고 마법을 맞을 때마다 마법 방어력이 올라가는 점을 활용해 담금질과 두드림의 미학을 즐길 수 있다 것도 뒤늦게 알았다.
함께 하고자 오랜 시간 망상했지만 현실이 다름을 깨닫는 건 너무나 저릿저릿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즐기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포기했을 때의 뒷맛.
일방통행의 순애보.
무능해서 보내줘야 했지만 끝까지 가면 꿀맛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좌절감.
훗날 유튜브에 올라온 그 때 그 고전게임의 공략 영상을 틀어놓고 보면서 달래는 그때의 아쉬움.
달래지지 않고 오히려 서글퍼지는 새벽 3시 중년의 39살.
모든 게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되지만 아직도 그때의 '브랜디쉬'를 지나가다 발견하면 나는 생각에 잠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