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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디쉬

침착맨
23.10.06
·
조회 27908

 나에게 학창시절 했던 고전게임은 볼 때마다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게 하지만, '브랜디쉬'라는 게임은 특히나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일단 게임 전면에 나선 '도라 도론' 일러스트가 매혹적이었고, 당시 '팔콤'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이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당시 '팔콤'은 부드러우면서 날카로운 도트 그래픽을 선진적으로 구현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학창시절 게임잡지에서 '브랜디쉬' 지면광고를 볼 때마다 설레곤 했다. 참고로 지금이야 광고가 나오면 귀찮지만 그 시절 게임잡지 지면광고는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좋아'였다. 새로 나온 게임 구경하기가 좋았고 광고인지라 해당 게임의 멋있는 부분만 범벅을 해 놓기 때문에 사실상 보기만 해도 배불렀다.

 

 못만든 영화는 티저가 더 재밌다는 말도 있잖은가. 게임잡지 지면광고도 딱 그랬다. 행복 가스를 마신 것 처럼 게임잡지 지면광고 구간은 모두가 신나고 행복하고 열정적이고 정의롭고 명석하고 의리있고 감성적이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그때의 내가 게임잡지를 광고부터 보고 또 보고 했던 이유였던 것 같다. 중학생이었기 때문에 외로웠고 감수성이 예민했다. 혼자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고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만화와 게임은 그만큼 부족한 나에게 없는 환상의 세계였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비리비리한 중삐리 침착맨은 그러던 어느날 머릿속에 막연히 기대하던 '브랜디쉬'를 어렵게 구할 수 있었다.

 게임잡지만 보면서 군침을 흘리던 과거는 이제 그만. 드디어 컴퓨터에 깔고 개처럼 즐기기만 하면 됐다.

 설치중, 설치 완료, 프로그램 실행, 고막을 찌르는 사운드 블라스터의 오프닝 음악, 그리고 화려하게 화면 정중앙에 박히는 로고.

 이제 간다!

 

 1시간만에 찍 쌌다.

 그것도 10분만에 때려치고 싶었는데 미련 때문에 50분 더 부여잡은 것이다.

 개같은 게임이었다.

 

 

 시점이 주인공 1인칭 고정인데 화면을 돌리면 세상이 돌아간다. 요즘 FPS 게임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랑은 다르다. 이 당시 기술력으로는 실시간 화면전환이 되지 않기 때문에 화면을 돌리면 90도 칼각으로 세상만물이 휙휙 변해버리는 것이다. 한 번 화면을 돌릴 때에는 괜찮은데 10번 정도 넘어가기 시작하니까 시신경이 파괴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당시 시력이 2.0이었으니까 받은 데미지는 더욱 컸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청력이 좋으면 음공에 더욱 취약하듯이.

 

 게다가 무기 내구도라는 신통방통 죽통 때리고 싶은 시스템이 있었다. 요즘에야 무기 내구도라는 개념이 있어서 이해가 안가겠지만 '브랜디쉬'의 무기 내구도 시스템은 요즘의 것과는 궤를 달리 한다. 예를 들어 장검 내구도가 20이면 한 번 휘두를 때마다 1씩 닳아 없어진다. 그 말은 20번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소인배가 만들었는지 나오는 무기들의 내구도가 10, 15 이런 식으로 더럽게 짜게 나왔다. 빡빡한 무기 내구도만큼 쓸 때마다 간장이 빡빡하게 경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칼을 여러 자루 가지고 다니면 될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굉장히 협소한 인벤토리 용적 때문에 여분의 칼을 더 챙기면 물약을 그만큼 못가지고 다닌다. 열쇠를 가지고 다닐 것이냐 물약을 가지고 다닐 것이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상황도 생긴다. 가지고 가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용적이 부족하니 앞날에 어떻게 될지 예측해서 아이템을 추리고 추려야만 한다. 시신경, 간장에 이어 뇌세포가 연쇄파괴 되는 느낌을 받는다. 고추가 저려온다.

 

 여기까지가 아쉬워서, 참고 하다보면 깊은 팔콤의 깊은 낫토 향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3회, 4회씩 재도전해서 알아낸 브랜디쉬의 감상이다. 해볼수록 느껴지는 건 낫토가 아닌 구토.

 

 10년 후에야 이 '브랜디쉬'라는 게임이 이 특유의 시스템으로 단단한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90도로 휙휙 돌아가는 1인칭 시점은 화면을 돌릴 때마다 급변하는 맵의 성질을 이용해 퍼즐요소로 즐길 수 있게끔 했다는 걸 알았다. 무기 내구도 시스템은 극한의 상황일 때 짜내는 재미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주인공이 때릴 때마다 힘이 올라가고 맞을 때마다 체력이 올라가고 마법을 쓸 때마다 지능이 올라가고 마법을 맞을 때마다 마법 방어력이 올라가는 점을 활용해 담금질과 두드림의 미학을 즐길 수 있다 것도 뒤늦게 알았다.

 

 함께 하고자 오랜 시간 망상했지만 현실이 다름을 깨닫는 건 너무나 저릿저릿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즐기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포기했을 때의 뒷맛.

 일방통행의 순애보.

 무능해서 보내줘야 했지만 끝까지 가면 꿀맛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좌절감.

 훗날 유튜브에 올라온 그 때 그 고전게임의 공략 영상을 틀어놓고 보면서 달래는 그때의 아쉬움.

 달래지지 않고 오히려 서글퍼지는 새벽 3시 중년의 39살.

 

 모든 게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되지만 아직도 그때의 '브랜디쉬'를 지나가다 발견하면 나는 생각에 잠긴다. 

 

댓글
dlwlrma
23.10.06
BEST
솔직히 얘기해 주세요.. 글 쓰고 싶어서 휴방 하는거 맞죠..?
주펄떡
23.10.06
BEST
[설레이곤]이 아니라 [설레곤]이겠지! 마춤뻡용사겜에서도 틀렸던 건데 아직도 모르나?
곰무원
23.10.06
BEST
금거맨이잖슴 ㅋㅋㅋㅋㅋㅋ
https://resources.chimhaha.net/comment/1696587668386-le6b7nxpoei.png
하스펄
23.10.06
BEST
https://resources.chimhaha.net/comment/1696587948216-le9fmef4a6o.png
침착맨 글쓴이
23.10.07
BEST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병건왕자
23.10.06
글 진짜 잘쓴다 .. 역시 작가
JeonGoon
23.10.06
복귀하면 두기랜드 스페셜로 1개월 정도 기강잡습니까
누군간해야하지만하지마
23.10.06
BEST
벌써 방송 근질근질한 이병건이면 개추 ㅋㅋ
김산책
23.10.06
일단 나부터 ㅋㅋ
일해라절해라
23.10.06
고전겜 이야기 꿀잼~
이기주의가판치고있어
23.10.06
와 포만감 무쳤다. 영상 대신 텍스트 오히려 좋을지도. 근데 쉬셔야지여.
염소야가라재미없다토끼야어
23.10.06
고추가 저려왔던 병건 학생 귀하네요, , ,
침착맨시청자
23.10.06
때리면 공격오르고 마법맞으면 마방오르고 듣기만하면 ㄹㅇ 잼써보이네요
빠니하오쉐쉐
23.10.06
찍쌌다 ㅋㅋㅋㅋㅋㅋㅋ ㅁㅊ
집에가고십다
23.10.06
구라안치고 살면서 쉬어가는거너무 중요한듯 멈춰야 비로소 안보이던것도 보이고 그림을 넓고 크게그릴수있음 방장 진짜 질릴때도록 쉬고 또쉬세요
Foucault
23.10.06
이러다가 침착맨 산문집 나올라
침참잘알
23.10.06
화과산돌숭이
23.10.06
게임이 읽기만해도 되게 빡빡해 보이네요 ㅋㅋㅋ
플선자
23.10.06
방송을 글로 대체 ㄷㄷ
와자뵤
23.10.06
방장님 글을 너무 잘 쓰셔요… 중간에 두 문장이 제 눈물샘을 자극하네요
성이름
23.10.06
저는 외롭고 예민하던 시기를 그냥 공허하게 떠나보냈는데 침님은 무언가로 채우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이런 글과 지금의 침착맨이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ㅎㅎㅎ 덕분에 추억여행 했네요 찍 쌌음
차돌수심
23.10.06
와 글 진짜 술술 잘 넘어가네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어릴때 게임잡지 무지 좋아했습니다. 게임잡지를 사면 번들cd까지 주니 게임으로 맛보고 잡지로 곱씹고 재미가 두배였지요. 저는 돈이 없는 학생이고 게임은 비싸니 게임잡지를 보며 눈으로만 즐기는 게임도 수두룩했더랬지요.
그리고 그건 저희 남편도 마찬가지였는지 결혼하고 보니 1990년 후반~2000년대 초반 게임잡지를 한가득 들고 오더군요. 하지만 이들은 4년간 신혼집 한켠을 장식하다 올해 둘째의 출산이 임박해온 탓에 며칠 전 방을 빼야 했습니다. 아이들 물건은 공간을 드릅게 많이 차지하니까요.
저희 둘 다 게임을 참 좋아하지만 당분간 으른의 삶을 살기로 했답니다. 발더게3 하고싶은데 애들 고딩되면 야자보내고 하기로 약속했어요. 그때쯤이면 발더게4가 나올지도 몰라 농담도 하고요. 아 께임하고 싶다!!
https://resources.chimhaha.net/comment/1696590186596-k1bzx53s6ir.jpg
차돌수심
23.10.06
방장님 덕에 주절주절 말을 많이 늘어놓았네요. 마지막으로 잡지 정리하다 만난 라라 크로프트 언냐 놓고 갑니다. 예전에는 요 그래픽도 여신 소리를 들었네요 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https://resources.chimhaha.net/comment/1696591115196-jquh6tpb78.jpg
위인배뚠뚠
23.10.06
우리한테 염병 미친놈들이라 해놓고 글은 정성들여 쓰는 츤데래…
우원박싸우자
23.10.06
츤츤
김봉달
23.10.06
게임 잡지 읽던 느낌 새록새록 난다 ㅋㅋㅋㅋ
매직박원장의직박구리폴더
23.10.06
아니 지가 글쓰고 싶으셨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텐도아카네
23.10.06
글이 참 ㅅㅅ하네요(슴슴하고 좋다는 뜻)
쵐참맨
23.10.06
중간중간 책읽는거 같은 기분이 들때마다 정신을 확깨워주는 한마디(찍쌌다,고추가저려온다 등) 이거 예술이네요
미노님
23.10.06
진짜 글 재밌게 쓰시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침커아이
23.10.06
이참에 오디오북 버젼도 괜찮을지도
피읖눈침저씨
23.10.06
솔직히 글쓰고 싶어서 이 게시판 만든거죠?
우리를 미친 회원들로 만들고?ㅋㅋㅋㅋㅋ
다람쥐곶감
23.10.06
고추저림맨...
단군때부터팬
23.10.06
웹툰->방송인-> 이제는 작가로 전향하신 침말년님....
끼요오
23.10.06
나 미쳤나? 음성지원 된다
내가만약뇌속의AI라면
23.10.06
표현이 너무 좋아요 ~ “일방통행의 순애보”. 사실 추억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고, 나의 시간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 스쳐지나가듯 보아도 나만이 떠올릴 수밖에 없는. 추억의 다른 의미는 일방통행의 순애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ㅎㅎㅎㅎ 침방장의 컨텐츠가 글이든 영상이든 그림이든 고유한 색채가 묻어 나와서 참으로 매력있다고 생각해요. 가을방학동안 자주 들러주세요. 잘 보고 있습니다 ~
포비돈
23.10.06
문단마다 들여쓰기를 지키네 역시 작가
요즘잘자는침냥이
23.10.06
나미칠것같아 개방장글너무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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