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가는대로 적어서 두서가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펜하이머>.
<배트맨> 시리즈와 <인터스텔라> 이후로 가장 만족스러웠던 놀란 감독의 영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나리오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가 서사 중심.
둘째가 인물 중심.
놀란 감독의 작품 중에서 굳이 이를 분류하자면.
<메멘토>는 10분 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가 자기 기억을 찾아가는 서사 중심이 되겠고.
<배트맨> 3부작의 경우에는 배트맨의 성장부터 은퇴까지 그 복잡하고 연악하면서도 강인한 내면을 그려내는 인물 중심이죠.
이번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는 명백히 후자입니다.
아래 내용은 캡쳐본은 제가 영화를 보자 마자 친구들에게 공유한 즉석 리뷰입니다.
역시 놀란 감독 하면 시간 아니겠습니까. 완전히 시간의 마술사죠.
<메멘토>는 사건의 순서가 거꾸로 흘러가며 점차 사건의 실마리가 풀립니다. 그리고 그저 작품 내 시간을 구분짓는 요소라고 생각했던 전화 내용은 마지막에 모든 반전의 빌드업이었죠. 제가 처음으로 접한 놀란 감독님의 영화, <인터스텔라> 같은 경우에도 지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을 대조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최근작인 <테넷>도 현재와 과거, 미래의 뒤엉킨 시간대로 작품의 흥미를 유발합니다.
<덩케르크>, <인셉션> 같은 경우에도 서로 다른 세 가지 시점을 번갈아 보여주며 긴장감을 끌어올립니다. 그럼에도 전혀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놀란 감독님의 탁월한 각본 실력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오펜하이머> 역시 크게 세 가지 시점에서 영화가 전개됩니다.
첫째,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인생사.
둘째, 오펜하이머의 비공개 안보 인가 청문회.
셋째, 스트로스의 상무장관 지명 청문회.
<오펜하이머> 자체가 원자 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전기 영화인 만큼 영화 초반과 중반에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인생사를 주로 보여줍니다. 이때 궤도 님이 침튜브에 나와서 설명해 주셨던 여러 일화들, 소개해 주신 과학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정말 반가웠습니다.
처음에는 아니 이 정도면 거의 스포일러 당한 기분이잖슴~ 하며 시청했죠.
하지만 맨튼 프로젝트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트리니티 때의 숨막히는 연출과 이를 두고 윤리적 고민을 하는 오펜하이머의 심리 묘사가 정말 탁월했습니다. 특히 트리니티의 핵폭탄 연출은 정말 사실적이고 압도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캬. 역시 놀란.
영화가 중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영화의 거의 주된 내용은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청문회로 변합니다. 이제부터는 오펜하이머의 복잡하고 입체적인 심리 묘사가 더욱 세밀하게 들어갑니다.
오펜하이머의 비공개 청문회 장면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속 재판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분명 오펜하이머가 잘못한 것은 있습니다. 불륜을 한 점이나 프로젝트의 성공과는 관계가 없는 것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국가 안보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 진실되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 이는 결코 잘한 행동이라고 할 수 없죠.
그러나 <이방인> 속 주인공이 그러했듯, 오펜하이머의 청문회는 필요 이상으로 그를 압박하고 모욕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심지어 종종 중점을 벗어나기도 했죠.
스트로스의 영화 속 대사대로 무엇이 진실이고 잘한 일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를 몰아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를 비롯한 관객들은 점점 더 오펜하이머의 편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그의 배우자로부터 순교자마냥 인내하지 말고 맞서 싸우라고 한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 변화는 없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순교자처럼 묵묵히 신념을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걸어갑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마치고 나서 느낀 점은 오펜하이머도, 그의 배우자도 진정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펜하이머가 처음 핵폭탄을 개발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인종적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파시즘 정권에 의해 유대인이 핍박을 받았고, 오펜하이머가 바로 그 유대인이었습니다. 오펜하이머도, 아인슈타인도 유대인의 안전과 보호, 권리, 자유 등을 위해 나치에게 핵폭탄을 사용하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의 오묘함일까요. 핵폭탄이 완성되기도 전에 나치가 항복해버리고 맙니다. 나치 정권이 몰락함으로써 본래의 목적은 이미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맨튼 프로젝트는 멈출 수 없습니다.
이제 오펜하이머와 과학자들은 인류의 역사의 영원한 종결을 위해 핵폭탄을 개발합니다. 핵폭탄처럼 무시무시한 대량살상 무기의 발명은 강대국들로 하여금 상호 확실 파괴의 두려움을 심어줄 것이고, 이를 통해 전쟁 억지에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고뇌합니다.
상호 확실 파괴의 두려움을 심어주려면 핵무기의 위력을 전세계에 알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일제의 막대한 인명 피해가 뒤따라야 합니다.
핵폭탄이 민간인, 병원, 학교는 피해가는 것도 아니고. 오펜하이머와 과학자들이 개발한 핵무기, 리틀 보이와 팻맨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집니다. 이로 인해 최소 22만명이 죽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이에 깊은 죄책감을 느낍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그들의 기술적 성공을 축하하는 척하지만, 사실 그의 내면은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죽음의 죄악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the world.”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몇 년 지나지 않아 소련이 핵폭탄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기존의 오펜하이머와 과학자들의 바람과 달리 그들이 다시 한번 핵폭탄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도달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미국의 안보와 평화를 위해 더 강력한 폭탄, 수소 폭탄을 발명해야 하는 상황에 빠집니다.
오페하이머는 자기 유명세를 활용해 지속적으로 핵 확산 저지를 위한 국제기구와 협력을 주장했지만, 냉전과 안보, 사상의 논리 아래 이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자기 과오를 바로잡고자 활동하지만 정치적 요인 탓에 결국에 그는 좌절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훌륭한 프린스턴 대학의 과학자였지, 워싱턴의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존경할 수 있는 점은, 그가 적어도 과학자로서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 모두 그 유명한 심리학 실험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짜 전기 고문 실험. 권위에 의한 복종이 피실험자의 죄책감을 덜어내고 책임감을 회피하도록 만들었다는 연구 결과로 유명한 그 실험.
그러나 보십시오. 어른,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과오를 부끄러워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여러 시를 통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했듯이, 오펜하이머도 부끄러워했습니다.
대게 사람은 부끄러움을 외면하고 정당화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마주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마치 순교자처럼 우직하고 강한 사람입니다.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마주할 수 있는 어른일까요?
영화 <오펜하이머>는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펜하이머>는 국제정치 분야를 전공하는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제 2의, 제 3의 맨해튼 프로젝트나 세계대전, 혹은 냉전이 시작된다면 너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
조국의 안보와 평화를 위해 타국, 심지어 적국이라 할지라도 민간인의 희생을 좌시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무슨 자격으로 생명의 무게를 재단하였느냐?
너의 가치 판단의 근거는 무엇이고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
오펜하이머는 2차 세계대전, 냉전 당시에 활동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미중 패권 경쟁이니, 우크라이나 전쟁이니 세계가 다시 혼란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기후 위기, 식량 위기, 인종적 갈등, 사상과 정치적 신념의 양극화 등 오펜하이머의 생전과 다름없는 아비규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 아니 어쩌면 지금 당장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내렸든.
적어도 우리는 오펜하이머가 그랬듯.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또한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성숙한 어른, 순교자를 자처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 후기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