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재미 위주로 작성된 글입니다.
아직도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주제라서
부정확한 의견이 서술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쪼록 재미로 보고 서툴러도 귀엽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독성 수정하고 글이 너무 빽빽한 느낌이 들어 중간에 시각자료도 다수 첨부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초기 삼국시대..
마한의 여러 세력들을 규합하여 백제가 마한의 맹주로 떠오를 적에
마한 남부 전라도 일대를 주름 잡던 ‘침’이 있었으니...
(그 와중에 북쪽의‘건마’국과 붙어있다.)
바로 ‘침’미다례 되시겠다.
어째서 침미다례국이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여러 ‘자치국’으로 이루어진 소국연합체의 성격을 띄어서라고
역사학자들은 설명한다.
이 연합체가 우리에게 아직 익숙치 않은 것은
비교적 최근에서야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인 분야라서 그렇다.
그렇다면 이 침미다례는 어떤 녀석들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얘네 아주 호방했다.
그 이유를 들자면 이 녀석들은 북쪽의 백제가 마한의 맹주로 자리를 잡았어도
그 패권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 쥰내게 깝치면 결국 삼괴권을 맞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
“해골 원 위치.”
이들은 3세기 혜성같이 등장한 근초고왕에게 해골원위치를 당하고나서야
한성 백제의 패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 백제 내부에서 무시못할 영향력을 보여줬으며
시간이 지나 백제가 점점 남쪽으로 몰릴수록 그들의 백제 내부에서의 발언권은 높아져갔다.
이 ‘침’과 자치령들의 파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주는 방증사례는 바로
이들이 실질적으로 백제에 복속된 동성왕~무령왕 시기에 갑자기 백제가 황해도까지의 영토 확장을 저질러버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침미다례 복속 직후 백제의 중흥기가 시작되었다 물론 나제동맹의 영향이 훨씬 컸다.
제갈량이 남만 기강 잡듯 백제도 후방을 확고히 해둔 것에 의미를 둔 것으로 추정>
이들이 백제 조정의 정책에 순응하여 군세가 급격히 증강된 것으로 해석된다.
백제가 한창 힘든 시기에는 이 지역에서 백제의 금동관이 발굴되는데
금동관은 백제가 지방 유력 귀족들에게 선물했던 것으로서
그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백제가 이들을 끌어들여 기울어져가는 백제를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나주 신촌리 출토 백제 금동관, 금동관은 지방 유력가문의 묘에서 주로 출토된다.>
이 지역의 정체성은 생각보다 강하여 삼국시대 이후로도 이 지역들의 독립성은 이어진다.
학자에 따라서는 훗날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후방에 상륙하여 형세를 역전 시킨 ‘왕건’의 나주 점령도
신라 체계 하에 존속한 침미다례 호족들의 협조 덕분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왕건의 나주 점령, 학설 대립이 있긴하나 침미다례 출신 호족들의 호응이 있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초기엔 여러 ‘자치구역’을 거느리고 ‘건마’국과의 세력다툼을..
이후 근초고왕 밑에서 쥐소룡으로...
그리고 후에는 ‘왕건’의 뜻을 따랐던 그들..
언제나 비주류로서의 포지션만을 고집했던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바로 고대의 침하하가 아니었을까?
아니, 그들이 원조 침하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아직도 역사학자들의 열띤 연구가 진행되는 주제이기에
학식이 짧은 나로서는 그저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 저런 이야기가 있더라’ 와 같은 내용만을 전달 할 수 밖에 없으니 침하하 횐님들도 가볍게 재미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