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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의 이방인으로 보는 실존주의 문학

그윈플렌
23.04.23
·
조회 7249

실존주의 문학

 

  실존주의 작가들에게도 관심 사항은 인간 존재가 하나의 중심적인 지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인간 존재의 진면목, 즉 실존을 인간의 기분에서 찾고자 하였다. 기분은 인간 존재를 조율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이며 그런 의미에서 기분이 바로 ‘근본기분’이다.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근본기분’에는 불안과 권태가 있다. 불안은 모든 사람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정서적 경험이다. 

 

불안에 사로잡힌 인간은 삶의 공허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 대상과 이유를 알 수 없다. 이러한 불안으로 인해 세계와 나 자신의 존재 전체를 낯설게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불안의 극복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합리적인 근거나 이유의 파악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흔쾌하게 긍정할 수 있는 상태로 우리의 존재 상태가 변화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권태 역시 불안과 같은 맥락으로 살펴볼 수 있다. 권태도 인간을 현존재의 일상성으로부터 실존의 본래성으로 불러내는 불안의 기능을 회복시킴으로써 실존적인 의의를 갖는다. 권태에 빠지면 역시 이렇다 할 근거 없이 어떤 공허한 기분이 인간을 엄습한다. 이러한 기분 속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중요한 게 없고 어디에도 참여할 수 없는 무관심한 상태가 된다. 권태가 인간을 송두리째 사로잡을 때,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것에서 도피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절망을 만난다. 하지만 이때 권태의 기능은 불안의 기능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결단하도록 하고 이 결단 속에서 인간은 비본래적인 현존재의 분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실존의 본래성으로 마음을 정하게 되는 것이다. 

 

 

 권태에 대한 정의는 여러 철학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권태를 ‘무의미함, 공허함’을 의미하는 ‘실존적 권태’ 혹은 ‘실존의 권태’라고 하며 이를 실존의 근원으로 보았으며, 하이데거는 개인이 어떤 환경에 의해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로 빠졌을 때 심층적 권태(실존적 권태)를 겪게 되고, 그로 인해 공허함을 느끼며 주변 세상으로부터 어떤 의미도 기대하지 못하고 받지도 못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 이러한 심층적 권태(실존적 권태)는 현존재인 인간을 깊은 고독에 빠지게 하며 그를 ‘단독자 자체’로서 본래적인 존재 가능성을 회복하게 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는 고독으로서의 권태가 형이상학적 근본 기분이며 이러한 ‘기분’을 통해서만 본래적 형이상학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피터 투이(Peter Toohey)는 그의 저서 ‘권태’(2011)에서 권태를 역사 속에서 인간이 늘 느껴온 보편적인 정서라고 강조하며 단순한 권태와 실존적 권태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는 먼저 단순한 권태를 단조로우며 새로울 것 없이 뻔하고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나 이러한 상황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있어야 할 때 느끼게 되는 상황적 권태와 과도한 반복으로 포만감이 극에 달하거나 시간적·공간적으로 무한히 되풀이되어 질려버릴 때 느끼게 되는 과잉에 의한 권태로 정의한다. 단순한 권태에 빠지면 시간이 느리게 가거나 멈춰버린 것같이 느껴지며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싫증이 나거나 피로하여 게을러지게 된다.

 

 

 ‘실존적 권태’는 인간의 실존과 관련이 있으며, 뚜렷한 이유가 없고,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기도 하며, 쉽게 사라지지 않는 특징을 가진다. 특히 실존적 권태는 인간이 삶의 본질 앞에서 느끼는 감정으로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인간의 근본기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로 인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성찰을 하게 한다. 이런 실존적 권태의 공통적인 양상은 무관심함, 무의미함, 공허함, 고독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실존적 권태의 이면에는 역설적으로 그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존적 권태가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도리어 자아를 인식하고 자유의지를 강화시키며 이를 통해 인간이 본래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하는 역할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 장에서는 실존적 권태의 양상과 권태의 극복으로의 전개 과정이 잘 드러나 있는 카뮈의 작품 ‘이방인’에 나타난 실존적 권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중앙시사매거진

 

이방인

 

무관심은 실존적 권태의 대표적인 한 양상이다. 권태에 빠지면 흥미 있던 일들에 대해 흥미가 사라지고 점차 자신과 주변의 삶에 대해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뫼르소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로제 키요는, “󰡔이방인󰡕을 다시 읽는다”에서 무관심이야말로 뫼르소의 존재 양식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뫼르소는 자신이 일하는 회사 사장이 파리에 가서 일할 수 있는 제안을 할 때도, 여자 친구 마리가 사랑과 결혼에 관해 물어볼 때도, 이웃 레몽이 자신과 친구 하고 싶냐고 할 때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의 뫼르소는 무관심하기 그지없지만, 그의 무관심한 태도는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해서 더 심각하게 드러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이 장면에서 아들의 슬픔이나 비통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 어제인지 오늘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표현에서는 무관심을 넘어서 무책임하게 보여진다.

 

 이런 무관심하고 무덤덤한 태도는 자신이 살해한 아랍인의 죽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 뫼르소는 재판받는 과정에서 예심 판사가 자신이 한 행동에 후회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차라리 좀 귀찮다 싶은 느낌’이라고 대답하는데 사람을 죽이고도 어떤 후회나 뉘우침, 불안감 등의 감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그저 귀찮다고만 하는 이 장면은 무관심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뫼르소의 무관심으로서의 권태의 근저에는 부조리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부조리는 사전적으로 ‘이치에 맞지 아니함’을 뜻하며, 이성이나 상식적 법칙에 어긋난 부조화, 불합리, 비논리를 뜻하지만, 카뮈의 부조리는 비이성적, 비합리적인 것이 아닌, 합리와 비합리의 뒤섞임, 즉 모순되는 두 대립항의 공존 상태로써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태는 이성의 존재인 인간이 비합리적인 세계 속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게 되는 갈등과 마찰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나와 세계, 나와 타자, 나와 나 자신 사이, 인간과 그의 삶 사이의 절연 혹은 단절이라고 할 수 있으며 거기서 오는 낯섦을 의미한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그에 대한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부조리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모호한 삶의 상황들, 삶의 조건들 전체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 전체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는 숙명적이며 더 나아가면 죽음에 대한 명철한 의식 혹은 ‘의식적인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관심으로서의 권태의 이면에는 관심, 어떤 욕망 혹은 갈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욕망과 고뇌, 고통과 희망, 좌절과 극복, 무관심과 관심이 얽혀져 있다. 쇼펜하우어는 삶이란 인간이 고통과 권태 사이에 내던져져 시계추처럼 그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이라고 했다. 욕망이 노리는 목표가 달성되지 못할 때 삶이 고통과 아픔으로 이어지고, 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하여 그것을 떠밀어 버릴 때 나타나는 것이 권태라는 것이다.

 

 이렇듯 뫼르소의 무관심으로서의 권태는 삶의 부조리함, 즉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유한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지만 스스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자신의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따르는 고통을 회피하며 살아갈 때 겪게 되는 기분이라고 볼 수 있다. 

 

 무의미함도 실존적 권태의 대표적 한 양상이다. 권태에 빠지면 ‘개인적 의미에 대한 인식의 상실’이 수반되어 욕구를 앗아갈 수도 있고, 삶이 헛되다고 느끼게 된다. 의미 상실로 인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면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뫼르소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삶에 있어서 의미와 가치를 두는 일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직장에서의 승진에도 사랑과 결혼에도 심지어는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이나 자신이 살해한 아랍인의 죽음에도 뫼르소는 무덤덤하다. 아랍인을 살해하고 체포된 뫼르소는 자신의 사건을 매우 간단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심문받는 상황을 장난 같다고 여긴다. 또한 선임된 변호사가 어머니의 장례식 날 마음이 아팠냐고 묻자

 

 “물론 나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라고 답변한다.

 

 뫼르소의 답변에서 그에게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며 그에 대해 어떤 의미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삶과 죽음에 있어서 무의미한 태도를 보이는 뫼르소의 모습에서 권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뫼르소의 무의미로서의 권태는 자의식과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삶에 대한 자유가 주어지면 인간은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이른바 자의식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자의식은 자기 반영적으로 의식하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느낌, 느낌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의식이다. 문제는 자의식으로 인해 인간은 자유가 주어지게 되면 불확실한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위험에 놓이게 됨으로써 불안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실존적 고립감, 무력감, 무의미함을 동반하는 권태에 빠지게 된다. 권태는 어떤 대상이나 상황 자체가 아니라 무의미한 대상과 상황을 억지로 해야 하는 자의식에서도 발생한다. 불분명한 삶을 사는 인간은 새로운 의미를 바라게 되지만 이 기다림은 끝이 없다. 거기에 더해 인간은 죽음을 통해 유한한 삶에 대한 ‘이중적 불안감’으로 인한 절망과 허무를 느끼며 살아간다.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자신 외엔 아무것도 없는, 그것도 무의미한 세계에서 무언가를 끝없이 기다리는 일, 이것이야말로 존재가 지닌 실존적 권태이다. 카뮈에 따르면 이러한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바로 부조리다.

인간은 대체로 부조리를 잘 느끼지 못하고 일상을 습관처럼 반복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의식이 깨어있지 못하고 졸고 있는 상태로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부조리를 만나기 전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 즉 의식이 졸고 있는 상태의 인간은 자신이 권태로운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부조리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 고찰을 무너뜨린다. 카뮈는 실존의 주인공으로서 인간은 모든 보편적 가치 체계를 거부하고 그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하며 부조리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한다. 즉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낯설고 섬뜩한 무의미한 존재에 마주하는 것, 부조리의 각성을 통해서 실존이 드러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의 각성이 다름 아닌 권태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뫼르소는 변두리의 간선도로에 면해있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간다. 그는 직장 동료, 여자 친구, 이웃과 함께 식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혼자서 시간을 보낸다. 뫼르소는 침묵에 가까울 정도로 말수가 적고 타인들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한다. 이렇게 타인과의 교류보다 혼자 있는 것에 더 익숙해 보이는 뫼르소는 살인 사건으로 감옥에 갇혀 재판받게 되면서 점차 자신을 ‘낯선’ 이방인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또한 뫼르소 자신이 법정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나는, 그것도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 놓고 나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고, 어떤 의미로는 그가 나 대신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벌써 그 법정에서 아득히 멀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낯선 존재라고 느끼며 법정에서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는 뫼르소의 모습에서 그가 점차 의식을 지니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소외는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특수한 자기 인식의 문제이다. ‘소외’라는 표현이 나타내는 사실은 객관적으로는 인간의 본질과 그 대상 사이의 다양한 분리와 균열이며 주관적으로는 생소하다는 느낌, 불안감과 관계된다. 실존의 인간은 혼자 힘으로 세상의 불안, 공포, 우연, 죽음 등과 대결하는 절대자 혹은 초월자의 위치에 서게 됨으로써 끊임없는 고뇌와 절망을 겪게 된다. 거기에 스스로를 의식하는 사고의 존재인 인간은 항상 자기의 정체성과 자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고 결국 단독자로서 삶의 의미를 구축해야 하므로 소외와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고독은 인간이 일상의 비본래적인 삶에서 되돌아서서 자신의 본래성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현재를 엄습하는 낯설고 불편한 기분이다. 여기서 인간은 결단을 통해서 실존의 본래성으로 마음을 정하게 된다. 뫼르소는 침묵하는 우주 한가운데 있는 고독한 존재, 실존의 인간이다. 사형에 처하게 된 뫼르소는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두렵고 고독한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죽음에 직면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결국 본래적인 자신의 실존을 만나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주체성이 무시되고 비인간화 현상이 만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기를 잃어버리고 비본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이 인격적 주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쁜 일상에 내몰리며 잡담과 호기심, 애매함 등으로 일상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즉 많은 현대인이 메마르고 절박한 삶의 상황에서 자신의 상황을 대면하여 실존을 인식하기보다 회피하거나, 지루한 일상에 매몰되어 무의미하고 무관심하며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삶의 의미와 중심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권태는 삶의 불가피한 일부이다. 권태는 인간이 느끼는 가장 보편적인 정서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권태는 삶에 의미가 없고 무관심하며 소외되고 고독한 양상으로 나타남으로써 일반적으로 인간 삶의 부정적 측면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불안이 인간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것으로 인식하지만, 오히려 실존철학에서는 인간이 불안에 직면할 때 자기 실존을 인식한다고 본다. 즉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면 삶에 의미를 붙이려는 모든 노력은 무관심과 절망적인 의심 속에 잠겨 버리고 무서운 고독과 고립 속에 잠기게 되지만, 인간이 이 고립을 이겨낼 때 비로소 그는 생생한 실존적 자유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권태의 의의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권태는 권태를 스스로 인식하여 대면하고, 숙고와 반성의 과정을 거쳐 결단할 때 극복될 수 있으며, 성장의 계기가 된다. 일반적으로 권태는 물질·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을 때 빠지기 쉬운 기분이다. 여유 없이 하루하루 간신히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시간을 분초의 단위로 쪼개가며 사는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그들은 잠시라도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궁금해하지 않으며 자신을 반추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때문에, 따분한 일상도 지겨운 것으로 의식하지 않는다. 스스로 의식하지 않으면 권태라는 기분은 느낄 수가 없다. 앞서 권태는 내면을 고찰함을 통해 스스로 권태에 빠져있음을 깨닫게 되고 이러한 권태의 자각이 권태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둘째, 권태는 진부한 지식이나 견해에 대해 비판과 의문을 제기하고 변화를 모색함으로써 창조성의 발판이 된다. 권태는 지속된 반복으로 익숙해져 더 이상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일이나 상황, 혹은 기존의 진부한 지식이나 개념 혹은 견해 등에 대한 불만족에서 비롯된다. 만약 인간이 매사에 자족하고 만족하는 삶만을 살아간다면 기존의 삶에 대한 비판이나 다른 곳으로의 호기심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는 아예 없을 것이며 변화와 발전 역시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권태는 비판과 호기심을 자아내며 인간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을 떠올리고 실제로 적용해보며 의문과 질문을 던지고 독창적 사고와 기술의 터득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많은 사상가나 예술가들도 지금까지 널리 인정되어온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변화를 모색함으로써 새로운 사상과 예술작품을 창조할 수 있었다.

 

 셋째, 권태는 인간 자신을 성찰하게 함으로써 주체적인 삶을 살게 한다. 권태에 빠지게 되면 인간은 스스로를 타인으로부터 고립시키며 일종의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더불어 소외감과 고독감을 느낀다. 그런데 이것은 역으로 자신과 세상 사이에 벽을 세움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기회로 볼 수 있다. 권태에서 비롯된 고독감을 느끼는 사람들 중에서 외로움과 단절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러한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독감은 오히려 타인의 시선이나 집착과 같은 갈등에서 벗어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독감이란 타인의 부재 때문에 느끼는 외로움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자발적으로 홀로 있으면서 자신의 내면적인 자아와 만나고 그 자아와 대화를 나누며 소통할 수 있는 요소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권태는 극복의 측면에서 보면 좀 더 나은 삶으로의 변화와 새로운 삶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권태의 극복은 권태의 극단이라는 한계상황을 직면하고 그에 대해 결정적 결단을 내림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에 권태의 극단에서 그것을

자각하고 새로운 삶으로 전환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 또한 권태는 주관적인 기분, 감정이므로 개인마다 느끼는 정도의 차이가 다르며 그 개념이 너무 방대하고 애매모호하여 명확하게 정의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에 교육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카뮈의 ‘이방인’에 나타난 실존적 권태는 빠름과 복잡함, 그리고 부조리함이 만연한 현대사회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불안과 공허함 그리고 권태로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카뮈는 인간의 유한적인 삶과 죽음, 그에 따른 모순과 갈등으로 야기되는 부조리함에 주목하였다. 그는 부조리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되 익숙함으로 인해서 찾아오는 권태로움을 그 신호로 보고 늘 깨어있는 의식으로 부조리를 정확히 직시하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갈 것을 제안하였다. 그로 인해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함으로써 당연시되는 세상의 가치만을 쫓아가는 객체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겪게 되는 무관심하고 무의미하고 고독한 권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권태를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권태를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바쁘고 분망한 나날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공허함과 권태 속에 사는 현대인들을 위해 권태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극복에 대한 지속적 논의가 필요하다. 

 

 

출처 : 카뮈의 이방인에 나타난 실존적 권태의 교육적 의의 
댓글
썬더블러프차돌짬뽕진동토템
23.04.23
BEST
예?
주부토로
23.04.23
BEST
직접 쓰신글이신가요?
저가요 지나가던 철학과인데요 혹시 대학원 가시면 잘하실것같아요! 그냥 그렇다구요!
후룪꾸
23.04.23
BEST
https://resources.chimhaha.net/comment/1682234905700-do6zt5bc3b.jpg
여름이었다
23.04.23
BEST
이과놈들 정신 못 차리네ㅋㅋㅋ
보롬보롬
23.04.24
사는 거 별 거 없다는 것을 겨우 납득하고서 충실히 살아가겠다는 태도를 갖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거 같아요.
무플방지위원회수석연구원
23.04.24
침하하에서 전공ptsd 느끼고 갑니다...ㅂㄷㅂㄷ
코트디부아르상아밀매범
23.04.27
저희 교수님이 절대 이방인 아니라 이인이라고 강조하신 작품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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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꼬치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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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3
신과함께 뮤지컬 보구 왔습니다 7
주펄
yong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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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