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설모>
산책을 하다 소리가 나서 옆을 보니 청설모가 식사 중이다. 청설모 사진은 종종 찍었으나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낯선 방문객이 요상한 물건을 들고 찰칵 소리를 내니 경계를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11-1번 차를 기다리는데, 다른 차가 올 때면 핸드폰을 보곤 한다. 버스 운전사에게 ‘저는 그 버스 안 탑니다’라고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일종의 바디 랭귀지인 것이다. 난 청설모에게 해치지 않을 거라고, 청설모에게 눈길을 뗀 채 괜히 카메라를 만지작 거렸다. 그제야 녀석도 안심을 했나 보다. 경계심을 거두고 하던 식사를 마저 계속한다. 역시 바디 랭귀지는 만국 공통의 언어다. 맹수에게는 사용하지 않도록 하자.

<살구나무>
오늘, 살구꽃을 찍었다. 아니 어쩌면, 매화인지도 모르겠다. 이방인의 도입부처럼 벚꽃을 포함해 셋을 구분하는 건 혼란스럽다. 셋 모두 계통분류상 벚나무속에 속한다. 속 하위 단위는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을 구분할 정도의 차이를 가진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다. 그래도 모르겠다. 어쩌면 살구나무의 눈으로 봤을 때에도 인간이 모두 똑같아 보이겠지. (???: 저는 눈이 없지만서도, 요호호호호-!)

<벚나무>
벚꽃은 매화나 살구꽃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핀다. 꽃봉오리 모양도 다르다. 살구꽃과 매화의 봉오리는 공처럼 둥근 데 반해, 벚꽃의 봉오리는 촛불 모양이다. 촛불은 온기가 있다. 벚꽃은 피기 전부터 따뜻하다.

<동고비>
나무 위에서 또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올려다보니 이번엔 동고비가 식사 중이었다. 무슨 열매인지 씨앗인지를 나무에 부딪혀 깨 먹고 있었다. 사진을 조금 찍으니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이내 높은 곳으로 날아가 하던 식사를 이어갔다. 동곱(애칭)아, 미안해. 방해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어. 화각 600mm 이상의 망원 렌즈와 셔터소리가 안 들리는 카메라를 준비하지 못 한 나의 지갑 잘못이야. 내 잘못은 아니야. 아무튼 미안해.
문득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연구를 위해 야생에 들어가야 한다면, 조용히 걷는 것이 아니라 일부로 소리를 내며 걷는다고 하셨다. 인간의 존재를 미처 파악하지 못 한 야생 동물이 가까이서 인간을 마주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맹수들도 마찬가지다. 작은 동물이든, 큰 동물이든, 자신의 영역에 평소에는 보지 못 한 낯선 존재가 있다면 두렵기 마련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소리를 내어 동물들을 피신시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동물들을 가까이 보고 싶은 마음에 암살자 스텝을 밟은, 뻐킹 아마추어였다.
(사실 도심 속 동물들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 적응을 한 경우가 많아서, 과하게 호들갑 떨 필요는 없긴 하다.)

<동고비2>
오늘따라 동고비가 많이 보인다. 덕분에 못 듣던 동고비의 노랫소리도 들었다. 동고비는 다양한 울음소리를 내는데, 대부분 인간의 휘파람 소리와 비슷했다. 아주 맑고 청아한 휘파람 소리가 났다. 풍문에 듣기로는 매운 음식을 먹으면 휘파람이 잘 난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동고비처럼 아름다운 휘파람 소리를 내기 위해선 최소 송주불냉면 정도는 먹어야 될 것이다. 사실 이름만 들어봤지 먹어본 적은 없어서 찾아봤더니 스코빌 지수가 2만 4천이라고 한다. 내 인생에서 제일 매웠던 음식은 핵불닭볶음면이고 스코빌 지수는 1만 2천이다. 그보다 두배라니… 드래곤볼 마냥 스코빌 지수 인플레 현상이 생기는 것 같다. 매운 맛은 통각이기 때문에 잘못 먹으면 큰일 날 수 있다. 아플 바에 그깟 휘파람 안 불고 만다.

<바위취>
걷다보니 눈에 띄는 풀이 있어서 사진을 찍었다. 검색해보니 바위취인 것 같다. 바위취의 개화 시기는 여름이라고 한다. 우리는 종종 꽃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것이 식물 자체라 믿지만, 사실 식물의 삶에서 꽃은 일부분일 뿐이다. 씨앗이 양지바른 곳에 떨어진 후부터, 새싹이 나고 줄기를 뻗으며 햇빛이 받기 좋은 위치에 이파리를 펼칠 때까지,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식물도 경쟁을 멈추지 않는다. 꽃은 그 경쟁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이벤트인 셈이다. 꽃도 아름답지만, 줄기와 이파리의 아름다운 서사를 알면 식물이 더 사랑스럽다. 침착맨님은 매미의 유충이 진짜 매미의 삶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유명한 명언이 떠오른다. “침착맨님, 관통하셨어요"


<개나리>
초등학생 시절 개나리 꽃을 따서 땅에 떨어뜨려보곤 했다. 낙하하면서 팽이 돌듯 빙그르르 회전하는 게 신기했다. 꽃은 식물의 생식 기관이다. 인류를 초월한 외계인이 재미로 나의 생식기를 뗀다면 끔찍할 것이다. 성인이 된 후로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무지함은 종종 잔인함으로 발현된다. ‘순수 악’이란 말이 이래서 나왔나 싶다.
쓸 데 없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좋은 하루 되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