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곳에서 언급했듯, 이번 대표팀의 투수진 컨셉은 땅볼+수비였을 겁니다. 경험해봤듯 도쿄돔은 더럽게 홈런이 잘 나오니,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땅볼 투수들 위주로 판을 짜고 메쟈에서 수비를 검증받은 에드먼과 김하성으로 뒤를 받치려 했을 겁니다.
대표팀 프론트라인 선발로 등판할 만한 선수는 김광현, 고영표, 구창모, 양현종 정도인데 이 중 원래대로라면 양현종과 김광현은 선발의 뒤를 받치는 역할로 기대되었던 것 같습니다.
WBC는 투구수 제한이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투수 운영의 기본 전략은 탠덤이었을 겁니다. 메쟈에서 선발들이 하도 쥐어짜면서 던지면서 이닝 소화력이 떨어지자, 3~4이닝 정도만 소화하는 투수 둘을 붙이는 게 탠덤인데 이강철의 코멘트를 보면 젊은 투수+양김의 형태로 비스무리하게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탠덤 안에서도 투수들의 핸드 타입을 어떻게 가져가냐 등등 다양한 전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인구라는 변수가 하나 발생합니다. 실밥이 조금 낮고 더 미끄러워서 슬라이더가 먹통이 되는 투수들이 좀 나와 (구창모는 손까지 작아서 실전 직전의 연습경기까지 변화구 컨트롤을 못 했고) 일부 투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할 계획에 금이 갔고, 전문 불펜 요원인 고우석은 연습경기에서 부상, 정우영도 공인구 문제인지 오락가락해서 이 둘을 대신할 소방수 카드, 속칭 ‘애니콜’이 김원중&원태인&정철원, 특히 김원중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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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중의 가장 큰 강점은 탈삼진입니다. 엔트리에 든 투수 중 9이닝당 탈삼진 12.56개로(그 뒤는 고우석 11.87개) 어마어마한 수준인데, 위기 상황에서 변수 없이 아웃 하나를 늘릴 수 있는 탈삼진 카드를 보유한 김원중을 위기에 쓰려는 게 기본 작전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연습경기에서 두 번 모두 김원중은 위기 상황에서 등판해서 잘 막았고요. (그래서 더 확신이 선 게 아니런지.)
정철원은 대표팀 구원진의 구속 담당이었을 거고(고우석이 없으니), 원태인은 체인지업이 공인구와 잘 맞은 건지 어떤 이유였는지까지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폼이 괜찮아서 간택되었을 겁니다.
B조 내에서의 전략은 모두가 알다시피 호주 잡고, 일본한테 비비고 나머지 둘은 무조건 잡고 가자였을 겁니다. 호주전을 맡길 선발로 영건은 마땅치 않으니(이의리/곽빈/소형준/구창모) 신들린 땅볼 유도, 공인구와 대충 잘 맞는 체인지업, 크보에서 증명한 성적이 모두 결합된 고영표가 낙점되었습니다. 호주전 선발 고영표는 애초부터 필승 카드로 계획되어 있었을 거고, 일본전 선발은 플랜을 대충만 그려놨던 것 같습니다. (소형준이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러면 더더욱 호주전 소형준이 이상해집니다.)
문제는 실전에 들어가니 전략이 모조리 먹통이 됐습니다. 고영표가 어떻게든 버텨주고 원태인&정철원으로 한번 막은 건 좋았는데, 소형준을 비교적 편한 상황에서 내보냈더니 장작만 쌓고 김원중은 탈삼진의 원동력이 되었던 공이 몰리면서 홈런, 양현종은 더 큰 참사를 일으키면서 전문 선발의 불펜 기용 + 김원중 애니콜 카드가 일그러졌습니다. (누구를 탓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단기전에서 예상치 못한 실점을 하는 건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 저는 일본전 선발이 구창모겠거니 했는데 연습경기 끝까지 제구가 되지 않는 걸 보고 ‘호주전에 몰빵하고 일본전은 그냥 아무나 내고 불펜데이 시키나?’ 싶었는데 이러면 상당히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소형준-양현종의 선택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불펜 대기하던 김양 중 양현종이 등판했는데 게임이 넘어가자 김광현이 그 자리에서 선발로 정해졌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코칭스태프들이 어지간히 급했거나 멘탈이 나간 모양입니다.
결국 처음엔 불펜 루틴을 돌다가 졸지에 모든 중책을 안고 한일전에 나서게 된 김광현은 2이닝까진 좋았지만 3회에 흔들렸고, 뒤로 나온 투수들이 줄줄이 무너지면서 그나마 남은 계획마저 완전히 박살났을 겁니다. 그래도 나름 크보에서 내로라하는 투수들 갖다 놨더니 스트라이크 하나 못 던지거나, 던져도 구속이 쭉쭉 빠지는 (정우영 평속 151, 일본전 대략 146~148) 광경을 보고 체코전은 어쨌든 이겨야 하니 남은 선택지는 그냥 ‘내가 보기에 괜찮았던 애들 쓰자’ 였을 거고, 그게 아마 원태인의 형태로 대표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결론은… 팀 구성까지는 괜찮았는데, 변수가 발생했는데 변수가 생각보다 투수들에게 영향을 많이 미쳤고, 뭔가에 쫓기는 듯 이 변수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결국 내가 믿는 특정 투수에게 부하가 가게 하면서 민심과 성적 모두 잡지 못한 결과가 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이게 백퍼센트 누구 잘못이야! 누가 못해서 그래! 이러려는 의도는 아니고, 그냥 뭔가, 뭔가 이상한데 안타까워서 길게 풀어 쓰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