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양털을 갖고 귀환한 이아손>
그리스 신화 '이아손과 아르고호의 원정대'는 오래전 이올코스의 왕자였던 이아손(Ἰάσων)과 아르고호의 용사들이 힘을 합쳐 모험 끝에 청동 거인 탈로스(Τάλως)와 독기를 뿜는 용이 지키고 있던 신비로운 콜키스 왕국의 비보 '황금 양털'을 얻게 된다는 전설이다.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얻고자 했던 이유는 황금 양털을 가져온다면 왕위를 돌려주겠다는 숙부 펠리아스의 내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때 콜키스의 공주이자 마녀였던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첫눈에 반해 자신의 마법으로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얻을 수 있게 도와준다.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의 황금 양털(1904), 전설에서 메데이아는 아르고호를 따라잡는 콜키스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남동생을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일부 판본에선 동생을 살해하고 바다에 던졌다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따라 그리스로 도망쳤으나 각각 사랑과 권력에 눈이 먼 이 둘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음은 그리스 신화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대부분은 이 전설을 그저 신화로 치부하며 콜키스란 나라도 실존하지 않은 전설 속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하긴 독기를 뿜는 용이 황금 양털을 지키는 나라가 현실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용은 현실에 존재하지는 않겠지만, 일리아스와 아이네이아스 속 전설의 도시 트로이(Troy)가 훗날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실존했음이 윌루사 유적지로 밝혀졌듯 콜키스도 실존한 나라였다.
<조지아의 국기와 국장, 자국의 공식 국호는 사카르트벨로(Sakartvelo/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라고 불린다>
그리스와는 흑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조지아(Gerogia)란 작은 나라가 있다.
몇 년 전까진 '그루지야'라는 러시아어 표기로 불리던 이 나라가 바로 고대엔 콜키스(Colchis)라고 불렸다.
<고대의 조지아 지역. 내륙의 '이베리아'는 카르틀리 왕국의 이명으로 오늘날 유럽의 이베리아반도와는 어원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다>
기원전 1300년대에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조지아의 해안가 지역을 콜키스(Colchis), 내륙 지역을 이베리아(Iberia)라 불렀는데 이 지역은 고대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 페니키아와 마찬가지로 여러 도시국가가 느슨한 연맹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콜키스 왕국은 기원전 8세기부터 평야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밀과 포도를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 국가들과 무역을 하며 번성했으며 그중 기원전 5~6세기에 건국된 아이아(Aia)는 당시 콜키스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현재는 아이아가 이아손과 아르고호의 원정대가 찾던 '그 전설 속 콜키스 왕국'으로 비정되고 있다.
<아이아는 오늘날엔 쿠타이시(Kutaisi/ქუთაისი)라고 불리고 있다. 쿠타이시는 공산정권 시기엔 대표적인 공업도시이기도 했다>
이후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라지카와 에그리시(Lazica/ეგრისი)라는 이름으로 동로마 시대까지 꾸준히 사서에서 언급되었으며 이슬람 제국이 나타난 후에는 압하지야와 조지아란 이름으로 다시금 등장한다.
즉 콜키스는 실존했던 나라였으며 이들이 고대 그리스와 교류했단 증거 역시 화폐나 그리스 식민도시의 유적지등의 고고학적 증거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황금 양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한 흥미로운 추정을 해볼 수 있는 유적지 역시 조지아에 존재한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თბილისი) 인근에 있는 Sakdrissi 유적지는 약 3000년 전부터 금을 채굴하던 금광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광이 될 수도 있다. 참고로 이 광산의 주변에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콜키스인들은 옛부터 강에서 사금을 채취했다고 한다.
바로 양털로 말이다.
"그들이 말하길 자신들의 나라(콜키스)에서는 금이 산의 급류를 타고 내려오기에 구멍이 뚫린 채반과 양털로 금을 얻는다고 한다."
"It is said that in their country gold is carried down by the mountain-torrents, and that the barbarians obtain it by means of perforated troughs and fleecy skins"
-스트라본의 지리학 11권 2장 中
로마 시대의 지리학자 스트라본(Strabo)은 콜키스인들은 광맥 근처의 강에서 양털을 강물에 담가 달라붙는 사금을 채취했다고 기록했는데 이 방법으로 금을 얻었다면 양털은 달라붙은 사금에 의해 반짝거리며 마치 황금으로 된 양털같이 보였을 것이다.
혹시 그렇다면 전설 속 황금 양털은 사실 콜키스인들이 사용하던 전통적인 사금 채광법을 은유한 것 아니었을까? 스트라본 역시 해당 내용을 서술하며 끝에 "콜키스인들은 이것이 황금 양털 전설의 기원이라고 했다."라고 적었으며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이아손과 메데이아 전설을 단순히 로맨틱한 전설이 아닌 금을 노린 그리스인들이 콜키스의 공주를 납치한 사건으로 풀이하며 이에 대한 사료들도 첨부하였다.
<조지아의 도시 바투미(Batumi/ბათუმი)에 세워진 황금 양털과 메데이아 동상>
즉 황금 양털 전설은 당시 지중해 교역로 못지 않은 흑해 해상 교역로와 함께 그리스인과 콜키스인의 금을 둘러싼 이해관계와 갈등이 신화로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선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Sakdrissi는 금광을 재개발하려는 조지아 정부와 환경보호단체와 학계의 충돌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참고 자료 출처>
스트라본의 지리학 (https://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trabo/11B*.html)
헤로도토스의 역사 (박현태 역/동서문화사 저)
영문 위키피디아 'Colchis' 및 기타 (https://en.wikipedia.org/wiki/Colchis)
TVN - 책읽어주는 나의 서재 '김헌 교수의 메데이아' 편 (https://youtu.be/6bqwPNkY-N8)
황금 양털(Golden Fleece)을 찾아서... (https://nhk2375.tistory.com/7167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