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천 취소(팬이에요)
잘 익은 포도가 추락하며 달콤한 향기를 사방에 풍겼다. 이윽고 딸기 서넛이 뒤따라 쏟아져 내렸다. 무너지기 시작한 좌판에서 먼저 떨어진 꼬마 과일들은 살길을 찾아 뭉치려는 듯 오밀조밀 모였다.
허사였다. 과일의 왕 수박이 그들을 덮쳤다. 밀집은 곧 떼죽음이었다. 산산조각이 난 과육에서는 보랏빛 과즙이 흘렀다. 그보다 더 거세게, 흥분한 관중의 야유가 흘렀다.
가시멧돼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날카로운 엄니를 흔들어대었다. 산산이 으깨진 과일 앞에서 그는 망연자실해 있었다. 차마 하늘을 저주할 힘도 없었기에 무릎을 꿇고 땅을 저주했다. 이토록 나약한 과실을 수확이랍시고 주신 어머니 자연을 원망했다.
관객들에겐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이 불쌍한 가시멧돼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줄 만큼 일말의 인간성이 남아 있는 자는 없었다. 그 정도의 측은지심을 발휘할 수 있는 이라면 감히 이 같은 광기의 축제를 즐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잖은 관객은 동정심이 뭔지도 모른다는 듯 욕지거리를 섞으며 팔뚝질을 해대었다.
“이봐! 배불뚝이!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제기랄. 저놈의 뚱땡이한테 전 재산을 다 걸었는데 이게 무슨 꼴이냔 말이야.”
저마다 휴짓조각이 된 도박권을 움켜쥐고 가시멧돼지를 조롱할 뿐이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기였다.
“아, 저런~ 이거 이번에도 글렀습니다.”
“뭘 글렀다고까지 그래. 어차피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구…”
관객 두 사람이 무대 뒤에서 음험하게 쿡쿡댔다. 재산을 잃었다기엔 침착하고, 대박을 따냈다기엔 정적이었다. 도박장에서 이런 태도를 유지하는 이는 단 한 부류뿐이다. 농간을 부리는 주최 측 인사.
“글렀습니다. 저 형님이 살집이 있어 우둔해 보여서 그렇지, 보기보다 훨씬 머리가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경기에는 항상 이런 실수를 하니 원… 도리가 없지요. 충분히 연습할 시간이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겁니다. 운이 나빴을 뿐이지요. 그래도 저희가 재미를 덜 봤을 뿐, 앉아서 돈 놓고 돈 먹는 것은 그대로입니다. 하하하.”
족제비를 빼닮은 안경잡이가 털보에게 속삭였다. 그 말은 얼핏 가시멧돼지를 변호하려는 듯했지만, 결코 비극적인 패배를 위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시종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가 있었으니.
“운이 나빴다고 변명할 필요는 없어. 저 친구의 지성은 내가 잘 알지. 하지만 우직함이 꼭 자랑거리가 되는 것도 아냐. 한낱 짐승도 앞날을 예측하는 법인데, 개미핥기만도 못하더군. 실로 실망스러운 경기가 아니었나? 역시 수박이 아니라 고기였어야 했는데.”
털보는 내심 대회 수준에 불쾌했다는 듯이 한 개비의 담배를 더 태웠다.
“충분히 즐겼다. 돌아가지.”
“이대로요? 저희야 강 건너 불구경이지만 이 패배가 널리 알려지면 배도라지의 명예가 다소 실추될 텐데요. 아랫것들이 분풀이하듯 떠들어댈 겁니다.”
“우천 취소.”
“예?”
“이 경기는 무효로 하지. 우천 취소된 거야. 비가 와서 아무도 수박 장사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수박 축제도 없던 것으로 된 거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우천이 썩 달갑지 않으면 강설이든 폭풍이든 좋아. 어떤 재난을 명목으로 하든 좋으니까 없었던 일로 하란 말이야.”
“돈을 잔뜩 잃은 관객들이 분개할 텐데요?”
“상관없어. 일확천금의 꿈이란 걸 모든 사람이 다 이룰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누구나 돌아갈 때는 잔뜩 밑천을 싸들고 갈 수 있을 줄 알지. 그것이 허상인지도 모르고…”
기나긴 휴가를 앞둔 털보는 쓸데없는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가시멧돼지의 탈락이건, 도박빚만 늘어 가는 머저리들의 분노건 항상 있는 일이었다. 안경잡이도 곧 수긍했다.
“분부대로 하죠. 그럼 다음 경기는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투기장.”
“12승 선언문도 씁니까?”
“쓰라고 해. 쓰든 안 쓰든 저놈들은 걸게 되어 있다. 누군가는 또 12승에 걸겠지. 개미핥기에게 좋다고 엉겨붙는 개미들이라니. 퍽 잘 어울리지 않나.”
털보와 족제비는 한바탕 웃더니 팔을 우스꽝스럽게 치켜들었다.
“아 뱀.”
아 뱀. 두 사람은 은밀한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오늘 일은 잊힐 것이었다. 영영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일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기억 속에서 산산이 바스러지다가 녹아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는 고기 쌀국수의 황홀한 잔향만 머무를 것이었다. 거대한 집단 최면이나 진배없는 아이러니를 앞두고 털보만이 웃었다.
(오늘 일어난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가상 상황을 묘사해보고 싶었습니다. 진짜 팬이에요.)